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翼翼齋 洪鳳漢

Hong BongHan

  • 준천계첩

濬川稧帖

The List Book of Joon-Cheon

지본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35×22.5㎝

서첩

추정가

  • KRW  5,000,000 ~ 15,000,000
  • USD   3,760 ~ 11,280
  • JPY     544,000 ~ 1,631,000

낙찰가

KRW 5,500,000

작품 상세 설명

조선왕조실록」 숙종 36년(1710) 9월 5일자 기록에는 이날 한성이 호된 물난리를 겪었음을 전하면서 가장 주된 원인으로 무차별한 산림 남벌을 다음과 같이 지목하고 있다. "무릇 네 산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 된 뒤로 사석(沙石·모래와 돌)이 흘러내려 봇도랑이 메워지고 물길이 막힘으로써, 가뭄에는 물이 고여 흐르지 않아 악취가 진동하는가 하면, 큰비가 내리면 평지까지 물이 범람해 부근 인가가 피해를 보았다". 이보다 약 50년 앞선 효종 5년(1654) 6월 8일자에는 "큰비가 내려 궐내로 물이 넘쳤다. 익사자가 생겼고 삼각산 작은 봉우리가 무너져 내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한성은 왕조 개창 이후 수재와 환경오염 등으로 해마다 골머리를 앓았다. 특히 그 중심부를 관통하는 개천(開川·청계천)은 골칫거리였다. 이에 제21대 영조(재위 1724-1776)는 '개천' 문제 해결을 위한 결단을 내렸다. 재위 36년째인 서기 1760년, 개천을 준설하는 대역사를 벌였던 것. 강바닥 토사를 걷어내고 하천을 정비하는 일을 보통 준설(浚渫)이라 하지만 당시에는 '준천'(浚川)이란 표현을 주로 썼다. 이 공사의 소상한 기록이 본 출품작 「준천계첩(浚川稧帖)」에 잘 나타나 있다. 공사를 위해 준천사(浚川司)라는 임시 관청이 설치됐으며 공사 최고책임자는 호조판서 홍봉한(洪鳳漢).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영조는 홍봉한에게 개천 준설작업에 관한 전반적인 개요를 수록한 보고서를 만들라고 명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되어 현재까지 몇몇 기관이나 개인에게 전하고 있는 자료가 바로 이 「준천계첩」이다. 세종대왕기념관 관장이자 한학자인 이해철(李海哲)씨가 심혈을 기울여 「청계천을 가꾸다」라는 제목으로 최근에 펴낸 책은 「준천계첩」에 대한 완전한 번역서이자 해설서이면서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공사는 이 해 2월 18일에 시작되어 57일만인 4월 15일에 끝났다. 이를 위해 이를 위해 투입된 인력은 총 21만5천380여 명. 예산은 "전(錢)이 3만5천여 민(緡)이요, 쌀이 2천300여 석"이었다. 그 자신의 의지로 실행된 대규모 ‘국책사업’이니 이에 대한 영조의 관심도 지대할 수밖에 없는 법. 3월 10일 광통교 현장으로 행차한 데 이어 공사 막바지인 4월 9일에는 비바람을 뚫고서 다시 청계천을 찾아 오수간문에서 현장을 관람했다. 청계천 준설 현장을 친히 둘러보는 영조의 행차 장면을 담은 당시 그림까지 수록돼 있어 사료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慕華館 親臨試才(모화관 친림시재)
모화관에서 친히 임하시어 시험을 치르게 하셨다.

三公句管 삼공구관
세 사람은 우측에서부터 김상로(金尙魯, 1702-?) 홍계희(洪啓禧, 1703-1771), 구선복(具善復, 1718-1786)이다.

都廳(도청) / 郞廳(낭청)

京都川渠之開奧在(경도천거지개오재)

者一朝成就倘非我(자일조성취당비아)

경진년 4월 당시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은 행호조판서(行戶曹判書)였음을 보여준다.
호조판서는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糧)·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호조의 최고책임자이다.

작가 소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이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중기(洪重箕)이고, 아버지는 홍현보(洪鉉輔)이며, 어머니는 임방(任埅)의 딸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다.
1735년(영조 11)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惠慶宮洪氏)으로 뽑혔다. 이듬해 세마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다음 해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낸 뒤 1752년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그리고 비변사당상이 되어 청인(淸人)들이 애양책문(靉陽柵門)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진절목(臨津節目)』을 편찬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句管堂上)·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世孫師)가 되었다.
1761년 세자의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으로 인책당한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 해에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한때 세자 문제로 파직되기도 했으나 곧 좌의정으로 복직되었다.
1763년에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영조의 정책에 순응해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당쟁의 폐해를 시정하고 인재를 발탁할 것 등의 시무6조(時務六條)를 건의해 시행하게 하였다. 또한 백골징포와 환곡작폐의 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하게 해 국고를 채우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도록 하였다.
1768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한 내용을 책으로 엮음으로써 그곳에 대한 영토의식을 높였다.
1771년 영중추부사로 있던 중 반대 세력에 의해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 진(恩信君禛)·은언군 인(恩彦君裀)의 관작이 삭탈되고 나아가 세손(世孫: 뒤의 정조)까지 그 권위가 위협 당하자 이를 막다가 삭직되고 청주에 부처되었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으로 풀려나온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세손(정조)의 외할아버지로서 영조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의 친정 인물인 김구주(金龜柱) 세력과 권력 다툼을 하였다. 영조 대 중반 이후 김구주 중심의 남당(南黨)에 대립했던 북당(北黨)의 중심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노론·소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1762년 세자가 죽음을 당할 때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해 후일 정적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영조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세자에 대한 처분을 뉘우치자, 그 사건을 초래하게 한 김구주 일파를 탄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은 『수의편(垂義篇)』을 편찬해 반대파를 배격하는 구실로 이용하였다. 정조 연간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시비가 정파 대립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를 공격 하는가 또는 두둔 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영조를 도와 조선 후기 문화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국정 운영에 대한 주장을 정조가 친히 편찬한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가 있으며, 그 밖에 『정사휘감(正史彙鑑)』·『익익재만록』 등이 있다. 시호는 익정(翼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