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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峯 韓濩

Han Ho

  • 시고첩(귀거래사)

詩稿帖(歸去來辭)

Draft Poem Scrapbook(The Tale of Homecoming)

지본묵서
Ink on Paper

28×17.7㎝

서첩

추정가

  • KRW  100,000,000 ~ 250,000,000
  • USD   75,200 ~ 188,000
  • JPY     10,868,000 ~ 27,169,000

낙찰가

유찰

작품 상세 설명

앞 표지에는 구룡산인 김용진이 「석봉선생신묵(石峯先生神墨)」, 숭양서옥주인진장(崇陽書屋主人珍藏)이라고 육서한 제첨[題籤 - 제첨은 동장본(東裝本) 표지의 좌측 상단 또는 중앙에 붙이는 단찰(短札) 형태의 종이 또는 천으로, 주로 책의 서명인 제명(題名)과 책의 순서인 책차(冊次) 등을 기록한 첨지이다. 절첩본과 선장본의 경우에는 표지의 좌측 상단에 붙였고, 권자본의 경우에는 펼쳤을 때 본문이 시작하는 뒷면, 즉 책을 말았을 때 보이는 겉면의 가장자리에 붙였다.]이 붙어 있다. 서법첩 앞 표지 속지 첫 장에는 ‘석봉진적(石峯眞蹟)’이라고 육서한 제첨이 붙어 있다. 그 뒤에는 ‘이근태인(李根泰印)’, ‘동헌거사(東軒居士)’, ‘청강과안(淸江過眼)’, ‘여흥이근태가진장금석서화인(驪興李根泰家珍藏金石書畫印)’이라는 인장들이 순서대로 날인되어 있다. 본문에는 석봉이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전문을 달필의 행초체(行草體)로써 정서하여 놓았다. 말미에는 위창 오세창․구룡산인 김용진․위당 정인보․해려 임상종의 배관기(拜觀記)가 순서대로 실려 있다.

①1941년 음력 9월 9일에 77세의 위창 오세창이 쓴 배관기에는 이 행초첩은 동헌 이군(東軒 李君)이 소장한 것으로서 우연히 얻어서 일람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필력이 눈을 쏘고 묵향이 코에 스며들어 추억이 봉주 왕세정(王世貞, 1526-1590)에까지 미쳤으니, 선생의 글씨를 헤아려 보건대 진실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비록 마지막 행에 낙관과 인장이 빠졌을지라도, 보배로운 작품을 감상하는데 무슨 해가 되겠냐고 하였다.
②1941년 음력 10월에 구룡산인 김용진이 쓴 배관기에는 석봉의 글씨는 마땅히 일소 왕희지(逸少 王羲之, 307-365)․청신 안진경(清臣 顔眞卿, 709-785)에 비견될 수 있다고 하였다.
③1941년 음력 10월에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가 쓴 배관기에는, 석봉 이후에도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많았으나 석봉과 비교하면 그에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결체(結體)의 씩씩함에 굳건함까지 더해졌으니, 타인들이 비록 힘은 있었을지라도 흠모하여 마침내 우러러보았다고 하였다. 게다가 일종의 쓸쓸하고 적적한 운치까지 이루었으니, 그 인품의 고매함을 알 수 있겠다고 하였다. 동헌 이군이 석봉이 쓴 ‘귀거래사’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글씨를 써주기를 부탁하기에, 첩 끝에 및 글자를 적어본다고 하였다.
④1941년 겨울에 해려 임상종(海旅 林尙鍾, 1886-1944)이 쓴 배관기에서는, 석봉의 글씨를 찬탄하는 문장이 쓰여 있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而獨悲
귀거래혜 전원장무호불귀 기자이심위형역 해추창이독비
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
오이왕지불간 지래자지가추 실미도기미원 각금시이작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舟遙遙以輕颺 風飄飄而吹衣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
주요요이경양 풍표표이취의 문정부이전로 한신광지희미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한들한들 가볍게 흔들리고,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乃瞻衡宇 載欣載奔 僮僕歡迎 稚子候門 三徑就荒 松菊猶存
내첨형우 재흔재분 동복환영 치자후문 삼경취황 송국유존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어린 것들의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有酒盈樽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
휴유입실 유주영준 인호상이자작 면정가이이안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 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常關
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이안 원일섭이성취 문수설이상관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遐觀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책부노이류게 시교수이하관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
경예예이장입 무고송이반환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귀거래혜 청식교이절유 세여아이상위 복가언혜언구
돌아왔노라.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於西疇
열친척지정화 낙금서이소우 농인고여이춘급 장유사어서주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 或棹孤舟 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혹명건차 혹도고주 기요조이심학 역기구이경구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 泉涓涓而始流 善萬物之得時 感吾生之行休
목흔흔이향영 천연연이시류 선만물지득시 감오생지행휴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나의 생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寓形宇內復幾時 曷不委心任去留 胡爲乎遑遑欲何之
이의호 우형우내복기시 갈불위심임거류 호위호황황욕하지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
부귀비오원 제향불가기 회양진이고왕 혹식장이운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요승화이귀진 낙부천명복해의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작가 소개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 군수대기(大基)의 5대 손으로, 정랑세관(世寬)의 손자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83년(선조 16)와서(瓦署)별제(別提)에 제수되었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 조선 시대 승문원과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벼슬은 흡곡현령(歙谷縣令)과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그의 묘갈(墓碣: 묘비)에 의하면, “송도(松都)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희지(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 체법(體法)이 될 만한 명필의 서첩]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되는 『악의론(樂毅論)』·『동방삭찬(東方朔贊)』·『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 작고 깔끔하게 쓰는 해서체의 하나)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 조맹부의 서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 생활 수준이 낮고 신분이 변변하지 못함)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비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 즉 사자관체(寫字官體)가 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제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干祿體)라 한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이윤식비(李允湜碑)」·「이별제공즙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忭墓表額)」, 과천(果川)「유용비(柳容碑)」·「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鄰碣)」·「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