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毅齋 許百鍊

Huh BaekRyun

  • 사계산수 10폭

四季山水 十幅

Ten-Fold Screen with The Four Seasons Landscape

지본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131.5×34.5㎝

배접(8EA), 액자(2EA)

추정가

  • KRW  3,500,000 ~ 10,000,000
  • USD   2,640 ~ 7,520
  • JPY     381,000 ~ 1,087,000

낙찰가

KRW 11,000,000

작품 상세 설명

①雨歇楊林東渡頭 永和三日盪輕舟 故人家在桃花岸 直到門前溪水流
우헐양림동도두 영화삼일탕경주 고인가재도화안 직도문전계수류
비 개인 버들 숲 동쪽 나루터, 영화 삼일에 작은 배 띄우노라.
복사꽃 핀 언덕에 동무의 집 있는데, 곧장 문 앞에 이르자 시냇물 흐르네.

②雪後園林梅已花 西風吹起雁行斜 溪山寂寂無人跡 好問林逋處士家
설후원림매이화 서풍취기안행사 계산적적무인적 호문임포처사가
눈 내린 후 동산 숲 매화는 이미 꽃이 피었는데, 서풍이 불기 시작하니 기러기 행렬이 기우네.
계산은 적적하여 인적이 없으니, 임포처사의 집을 곧잘 묻네.

③石赭班班半雜苔 晴雲纔去雨雲來 米家山色渾無定 潑墨何人解脫胎
석자반반반잡태 청운재거우운래 미가산색혼무정 발묵하인해탈태
돌에 붉은 빛 역력한데 반 이끼 끼었고, 맑은 구름 지나고나니 비구름 몰려오네.
미가의 산수화는 혼미하여 정해진바 없으니, 어느 누가 먹물 뿌려 환골탈태 시키리오?

④青山㡬里入煙霞 杖履尋春未覺賒 流水小橋邨路晚 隔林應有野水家
청산기리입연하 장리심춘미각사 유수소교촌로만 격림응유야수가
청산은 몇 리나 저녁놀에 잠겼나, 지팡이 끌고 봄 찾아 나서니 때 이른 줄 모르네.
흐르는 물 작은 다리 건너 마을길은 저문데, 숲 저쪽에는 마땅히 시골 사람들이 살고 있으리.

⑤萬竹林中草縛庵 溪聲隱隱隔雲嵐 日長客去收經卷 一枕淸風睡正酣
만죽림중초박암 계성은은격운람 일장객거수경권 일침청풍수정감
수많은 대숲 가운데 풀로 집을 얽었는데, 은은한 시냇물 소리가 구름 안개를 뚫고 들어오네.
해는 길고 길손 가니 경전 두루마리 걷은 뒤, 베갯머리에 맑은 바람 불어 단잠에 빠지네.

⑥數口妻兒綱一張 船爲家舍水爲鄕 江北江南山如畵 欸乃聲中送夕陽
수구처아강일장 선위가사수위향 강북강남산여화 애내성중송석양
몇 식구 아내와 아이는 밧줄 하나로 매인, 배를 집삼고 물가 집을 고향 삼네.
강의 북쪽이나 강의 남쪽산은 그림 같아. 뱃노래 소리 속에 석양을 보내네.

⑦湖山淸夏不應豊 一徑林陰水石中 六月凉生靑蒻底 釣魚船上一絲風
호산청하불응풍 일경임음수석중 륙월량생청약저 조어선상일사풍

⑧野水參差發漲痕 疏林欹倒出霜根 扁舟一櫂歸何處 家在江南黃葉邨
야수삼차발창흔 소림의도출상근 편주일도귀하처 가재강남황엽촌
들녘 물 들고나니 불었던 자취를 드러내고, 성긴 가지 들쭉날쭉 서리에 뿌리를 드러냈네.
조각배 노 저어서 이드 메로 돌아가나, 우리 집은 강남의 황엽촌(黃葉村)에 있다오.

⑨霜落林端万壑幽 白雲紅葉入溪流 朝來尙有尋眞至 行向山亭領素秋
상락림단만학유 백운홍엽입계류 조래상유심진지 행향산정영소추
숲가에 서리 내리고 뭇 골짜기 그윽한데, 흰 구름 붉은 낙엽 개울물로 흘러드네.
아침에 님 찾아 여기와 여태 있는데, 산 정자로 올라가니 가을임을 알겠네.

⑩十里空江一物無 靑簑曳雪老漁孤 酒筵正待黃魚熱 對此寒生綠葉蒲
십리공강일물무 청사예설로어고 주연정대황어열 대차한생록엽포
저 멀리 십 리의 빈 강에는 아무 것도 없고, 푸른 도롱이에 눈 맞는 한 늙은 어부만 있네.
술자리에 황어가 익어가는 것 바로 대하고서, 이 경치에 푸른 잎 부들에는 한기가 생기네.

작가 소개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의재(毅齋). 전라남도 진도 출생.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닌 후, 신학문에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기호학교(畿湖學校)에 입학하였다가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정학을 전공하려다가 그림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 화단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았고, 고향에서 종고조(從高祖)뻘 되는 19세기의 대화가 허련(許鍊)의 아들인 허형(許瀅)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혔던 재질이 전문적인 그림 수업을 결심하게 한 것이었다.
동경에 약 6년간 머무르며 당시 일본의 대표적 남종화가(南宗畫家)였던 고무로(小室翠雲)의 영향을 받아 정통 남종 산수화를 지향하게 되었다.
1918년 고향으로 일단 돌아갔다가 1922년서울에 올라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전통적인 산수화를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27년까지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그 뒤 전라남도 광주에 정착하여 독자적 화필 생활과 문하생 지도에 전념하였다.
그는 같은 세대의 신예들이 모두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적 작풍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오로지 옛법〔古法〕에 충실한 화격(畫格)을 자신의 세계로 심화시키는 방향을 고수하였다. 그의 산수화와 문인화는 전통 남종화 정신과 그 기법의 철저한 계승이었다.
1938년에는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켜 회관까지 마련하고 호남 지역의 서화 전통을 더욱 떨치게 하려는 노력을 주도하였다.
문인화가 이범재(李範載)와 구철우(具哲祐)는 그때의 제자이다. 그 뒤에도 문하에서 김옥진(金玉振)을 비롯한 많은 전통적 산수화가가 배출되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무등산 다원(無等山茶園)을 인수하여 축산 농장을 경영하면서 화필 생활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1947년에는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집안의 청소년들에게 농사 기술을 익히며 학업도 닦게 하는 등 사회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國展)]가 시작되자 추천 작가·초대 작가로 추대되고,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62년문화훈장 문화포장(文化褒章)을 받았다. 또 1966년에는 예술원상 미술 부문을 수상하였다.
한시(漢詩)와 고전 화론(古典畫論)에 통달하고 서법(書法)도 독특한 경지를 보인 시·서·화 겸전의 전형적 남종화가로서 호남 서화계의 상징적 거봉으로 추앙되었다. 1973년에 대규모 회고전이 서울에서 동아일보사에 의하여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