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청화 화훼문합 3점
白磁靑畵 花卉文盒 三點
White & Blue Porcelain Tureen with Flowering Plant Design 3 Pieces
①4×6.5×4㎝, ②5×4×5㎝, ③3.9×7.2×5.7㎝
(조선시대)
보존 상태 : ①뚜껑-구연부 일부 수리 및 일부 유, ②양호, ③뚜껑·합-구연부 일부 수리
추정가
- KRW 120,000,000 ~ 250,000,000
- USD 90,240 ~ 188,000
- JPY 13,041,000 ~ 27,169,000
낙찰가
KRW 100,000,000
작품 상세 설명
조선시대 청화백자는 15세기에 명나라의 청화백자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초기의 것과 한동안 맥이 끊긴 이후 18세기에 들어 다시 제작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청화백자는 특히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고소메(古染)라고 불러서 아직도 일부에서 이런 말이 통용되고 있다. 소메(染め)는 달리 소메츠케(染付)라고도 한다. 초기 청화백자는 당시 명나라 청화백자와 닮은 점이 많다. 대개 중국 청화백자는 도안화된 문양이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가득 차 있는 것이 특징인데 조선초기의 청화백자도 다분히 그렇다. 특히 명나라 8대 황제인 성화제(재위 1465~1487)때 만들어진 청화백자와 조선초기 청화백자는 매우 유사하다. 청화 안료는 중국에서도 명나라초기 영락제(1403~1424)와 선덕제(1426~1435) 연간에 아라비아와 교류하며 아라비아산 코발트를 수입해 사용했다. 조선은 이를 다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특히 비싸고 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당시 회교권에서 수입해온 이 청색 안료를 회청(回靑),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다. 조선 초기에 비싼 수입 청화 안료를 국산으로 대체하기 위해 국내에서 코발트 안료의 채굴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때 발견한 국내산 코발트 안료를 쓴 청화백자도 전하고 있다. 이들은 아라비아산에 비해 맑고 푸른 기운이 덜하며 또 철분이 섞인 탓인지 약간 검게 발색되기도 한다. 국내산 산화 코발트는 당시 토청(土靑)이라고 불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다시 제작하게 된 청화 백자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양식을 보인다. 특히 18세기 전반에 경기도 광주 금사리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는 전형적인 조선 양식을 보여준다. 이때 제작된 청화백자에는 국화, 패랭이 등과 같은 들풀 문양이 들어있는 것이 많은데 이런 추초문(秋草文)은 시대적 특징이기도 하다.
본 출품작은 조선의 초중기 수입 코발트를 안료로 쓴 청화백자 작품들이다. 먼저 선명한 농담의 청화 안료로 모란, 당초 등 각종 초화문을 화려하게 시문하여 아름다움을 배가 시키고 있다. 백자의 유색 역시 청백색의 빛이 맑고 또렷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사료되며, 각기 규격에 맞는 뚜껑도 보존이 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