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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 유혁로 雪嶽 柳赫魯Yoo HyukRo

1852 ~ 1940

조선·근대

작가약력

  • 1852(철종 3)~1940.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지식인이자 관료.

작가 소개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설악(雪嶽)이다. 아버지는 하급 무인이던 유상오(柳相五)이다. 충청남도 평택군 남면 송하리[현재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송하리]와 경성부 관훈동 193번지[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를 오가며 생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1872년(고종 9)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876년(고종 13) 3월 무과에 급제하여 11월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에 임용되었다. 일찍이 개화당에 합류하여 활동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 고베[神戸], 오사카[大阪], 도쿄[東京] 등지에서 일본 문물을 접하였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에서 개화당의 행동대원으로 전령(傳令)을 맡아 통신 연락과 정찰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후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金玉均)과 함께 일본으로 도주하여 박영효의 지도 아래 친린의숙(親隣義塾)을 운영하며 망명 생활을 하였다. 이때 유혁로는 김옥균을 자객들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맡았다. 당시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894년(고종 31) 박영효가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한 것으로 추정되며, 1895년(고종 32) 부령(副領)을 거쳐 군부포공국장(軍部砲工局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을미사변 당시 일본군과 함께 왕궁에 침입했다가 이후 친러 내각이 성립되자 도주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고종 43) 통감부(統監府) 개설 후 귀국하여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를 역임하고, 1907년(고종 44)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평안북도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경기도참여관(京畿道參與官)을 지내고, 1914년부터 1916년 3월까지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수행하였다. 유혁로는 일제강점과 함께 은사금(恩賜金) 5,000원을 받았다. 1916년 충청북도지사(忠淸北道知事), 1919년 전라북도지사(全羅北道知事)를 지냈다. 1921년 중추원참의가 된 이후 1940년 사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 중임하였다. 1920년 조일석감(朝日石鹼)주식회사 감사를 맡아 재직하였고, 대륙호모공업(大陸護謨工業)주식회사 이사, 한성신탁주식회사 감사 등을 지냈다. 1926년 하반기부터 동민회(同民會)[1924년 서울에서 결성되었던 친일 단체] 평의원으로 활동하며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 융화(日鮮融化)를 주장하였다.
유혁로는 1920년 9월 훈4등 서보장(瑞寶章), 1926년 11월 훈3등 서보장,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수상하였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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