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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심사정 玄齋 沈師正Sim SaJeong

1707 ~ 1769

조선

한국화

작가약력

  • 1707(숙종 33)∼1769(영조 45).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작가 소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와 묵선(墨禪).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의 증손이자 심익창(沈益昌)의 손자이며 포도를 잘 그렸던 심정주(沈廷胄)의 아들이다. 포도와 인물을 잘 그렸던 정유승(鄭維升)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과거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일생 동안 화업(畵業)에 정진하였다. 할아버지 심익창의 과옥(科獄: 과거시험의 부정으로 인해 일어난 대규모 옥사)과 왕세제 시해 사건으로 집안이 몰락하였기 때문이다. 심익창이 김일경(金一鏡)의 연잉군(延礽君 : 훗날의 영조) 시해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면서 그의 집안은 역모 죄인의 집안이 되어 영원히 재기할 수 없게 되었다. 부친 심정주를 비롯하여 심사정은 다행히 화를 면하였지만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일생을 그림으로 지냈다. 친가와 외가의 그림에 대한 소질을 이어받았던 심사정은 몰락한 양반이라는 처지로 인하여 직업화가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것이다.
심사정에 대한 기록은 영세한 편이지만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그와의 교류가 확인되는 인물로는 강세황(姜世晃), 김광수(金光遂), 김광국(金光國), 이광사(李匡師), 심익운(沈翼雲), 이덕무(李德懋) 등이 있다. 강세황은 그의 작품에 많은 화평을 남겼으며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과 같은 합작을 남기기도 하였다. 1744년 작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화수장가인 김광수, 김광국과 교유하였음이 나타난다. 그의 묘지명을 지었던 심익운은 인척으로서 생활이 어려운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748년(영조 24) 삼성진전(三聖眞殿)의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에 조영석(趙榮祏), 윤덕희(尹德熙)와 함께 화사(畵事)의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심익창의 자손으로 어진 제작에 참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사직(司直) 원경하(元景夏)의 상소에 의해 5일 만에 파출되었다.
어려서 정선(鄭敾)의 문하에서 직접 그림을 배웠다. 정선에게 사사 받은 화풍을 바탕으로 진경산수(眞景山水)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중국의 절파화풍과 남종화풍을 받아들여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주로 『고씨화보(顧氏畵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과 같은 서적을 통해 남종화풍을 수용하였다. 그의 그림은 이른바 ‘조선남종화’로 평가되며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등과 함께 18세기 화단에 남종화풍이 유행하고 정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절충적 화풍을 보이는 그의 화풍은 최북(崔北), 이방운(李昉運), 이인문(李寅文) 등 주로 직업화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강세황의 기록에 의하면 심사정은 명나라 오파(吳派)의 비조인 심주(沈周)의 화풍을 배워 피마준법(披麻皴法)을 구사하였다. 아울러 북송(北宋)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의 대혼점(大混點) 등 남종화풍을 구사하였다고 한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전형적인 북종화법(北宗畵法)인 대부벽준(大斧劈皴)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 중국 원나라 말기에, 남종화가인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 네 사람을 이르는 말) 화풍의 수용도 엿보인다. 그의 자호를 현재(玄齋)라 한 것은 명나라 말기의 남종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의 아호인 현재(玄宰)를 따른 것이다. 중국의 화법을 다양하게 섭렵하고 남·북종화풍을 모두 수용하여 대륙적 면모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작품은 당시 중국에서도 인정받았다.
신위(申緯)는 심사정이 옛 것을 따랐지만 자운(自運: 글씨본을 보지 않고, 쓰는 사람의 마음대로 붓을 움직이는 일)이 모자란다는 혹평도 하고 있다. 그러나 세련되고 능숙한 필치와 묵법으로 자신만의 개성적인 회화 세계에 도달하였다.
그의 현존하는 작품은 산수화의 비중이 가장 크지만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도 남기고 있으며 도석 인물(道釋人物), 화훼초충(花卉草蟲), 영모(翎毛), 사군자(四君子) 등에서도 능숙한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강세황은 심사정의 작품 전반에 대하여 화훼와 초충을 가장 잘 그렸고 영모, 산수 순으로 잘 그렸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회화들은 담묵(淡墨: 엷은 먹)과 농묵(濃墨: 짙은 먹)을 대담하고 활달하게 사용하였으며, 세필(細筆)의 정교한 묘사까지 구사하였다. 아울러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다양하게 이용하였다.
산수화의 대표작으로는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촉잔도권(蜀棧圖圈)」(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손꼽힌다. 1747년 그가 만 40세 때에 그린 「강상야박도」에는 “들길은 구름이 드리워 어두운데 강 위의 외로운 배만이 불을 밝히고 있네(野逕雲俱黑, 江船火獨明)”라는 두보(杜甫)의 「춘야희우(春夜喜雨)」가 화제(畵題)로 적혀 있다. 그의 불우한 생애를 연상시키는 시의와 어울리는 그림의 쓸쓸한 정경은 그가 이미 문인화의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준다. 화풍은 북송의 미불, 원말 사대가인 예찬(倪瓚), 명대(明代)의 오파 화가(吳派畵家)들을 따른 흔적이 뚜렷하다. 이미 40대에 남종화풍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개성화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1766년에 그린 「파교심매도」는 만년의 전형적인 남종화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1768년 말년에 그린 「촉잔도」는 그가 영향 받은 남·북종 대가들의 화법을 종합한 대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부벽준법 등 송나라 때 화원 화가인 이당(李唐)의 필법이 엿보인다. 동시에 피마준법 등 남종화풍도 겸용하고 있으며 화의(畵意)는 남종화에 가깝다.
실경산수화로서 「명경대」, 「만폭동」 등 금강산 그림과 서울 주변을 그린 「경구팔경도(京口八景圖)」가 전한다. 화법에서 각이 진 먹선, 부벽준 등 자신의 필법이 강하게 눈에 띤다.
그는 도석인물화에서 다양한 주제와 지두화(指頭畵)라는 새로운 화법을 사용하여 18세기 도석인물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다.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유해섬상(指頭劉海蟾像)」에서 능숙한 화경(畵境)을 느낄 수 있다. 그 외에 부드럽고 밝은 채색의 화훼초충과 영모화들이 전한다. 사군자에서도 사의(寫意)를 표현하는 데 치중하여 대담한 필법을 보인다. 심사정은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후기 회화의 흐름을 주도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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