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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수 宋惠秀Song HyeSoo

1913 ~ 2005

한국

서양화

작가약력

  • 1938년 재동경미술협회 회원
  • 1939년 제2회 재동경미술협회전 출품 (화신화랑, 서울)
  • 1940년 제3회 재동경미술협회전 출품 (조선총독부 미술관, 서울)
  • 1941년 제11회 도쿄 도쿠리츠텐(獨立展) 입선
  • 1942년 제6회 도쿄 미술창작가협회전 입선
  • 1943년 제7회 도쿄 미술창작가협회전 입선 및 본상 수상
  • 1949년 유화신작전 출품 (대원화랑, 서울)
  • 1950년 50년 미술협회 결성
  • 1951년 종군 스케치 3인전 (송혜수ㆍ장욱진ㆍ한 묵) 개최
  • 1951년 내자아파트 (휴전시 외국기자 숙소) 현역작가 초대전 출품
  • 1951년 국립 중앙공보관 개관 기념전 출품 (서울)
  • 1951년 한국 현대대표작가 초대전 출품
  • 1952년 종군화가 작품전 출품 (22인)
  • 1959년 한국미술대상전 초대작가
  • 1963년 김원갑ㆍ전혁림과 전시
  • 1967년 한국근대미술 60년전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 1967년 한국현대화가 100인전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 1967년 국립현대미술관 상설미술전 초대출품
  • 1969년 부산 수운화랑 개관기념전 출품
  •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 초대작가
  • 1972년 한국신자유미술가회 창립회원 (부산)
  • 1973년 제6회 후기회전 출품 (부산시민회관 화랑)
  • 1974년 홍익대학교 미술박물관 개관기념 현대작가 초대전 출품
  • 1974년 한국예술진흥원 초대전 출품
  • 1975년 지방작가 초대전 출품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서울)
  • 1976년-2004년 개인전 (9회)
  • 1977년 신조형파 회원
  • 1977년 송혜수ㆍ전혁림 은지화전 (부산공간화랑)
  • 1977년 한국현대서양화대전 출품
  • 1978년 서양화 소품전 출품 (희화랑, 서울)
  • 1978년 서양화 1950년대 회고전 출품 (문화화랑, 서울)
  • 1980년 서양화 16인 초대전 출품 (국제화랑, 부산)
  • 1980년 전기전(前期展) 출품 (원화랑, 부산)
  • 1981년 부산해경전 (원화랑, 부산)
  • 1981년 신자유미술가전 출품 (원화랑, 부산)
  • 1982년 롯데미술관 개관 3주년 기념 초대전 출품
  • 1983년 83 현대미술 초대전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 1989년 Cosmopolitan 회원 (U.S.A / LA)
  • 1989년 눌원 문화상 수상
  • 1989년 송혜수 해외풍물초대전 (부산유나백화점 화랑)
  • 1980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 LA 거주
  • 1996년 한국의 누드미술 80년전 (예술의 전당 미술관, 서울)
  • 1997년 근대를 보는 눈, 한국현대미술 : 유화 (국립현대미술관)
  • 1998년 부산미술재조명전 (부산시립미술관)
  • 1999년 근대를 보는 눈, 다시 찾은 근대미술 (국립현대미술관)
  • 1999년 한국미술 99 - 인간ㆍ자연ㆍ사물 (국립현대미술관)
  • 2000년 마음의 낙서전 (최장호 갤러리, 부산)
  • 2001년 동다송 문화상 수상
  • 2002년 송혜수 은지화전 (최장호 갤러리, 부산)
  • 2004년 부산시 문화상 수상
  • 2005년 송혜수 미술상 제정
  • 2005년 3월 29일 타계

작가 소개

평양 출신의 일본 유학파로서 6·25전쟁 이후 부산에 정착해 2005년 타계할 때까지 줄곧 전업 작가의 삶을 살았다. 성장기와 청년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전쟁과 분단 속에서 평양, 동경, 만주, 서울 등으로 옮겨 다니며 시대의 혼란을 겪었다. 미술교육은 일본 유학을 전후로 독학과 동경제국미술학교에서의 학습, 유화가 츠다 세이슈(津田 正周)로부터의 사사를 통해 기초를 다졌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전위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 독립미술협회전, 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입선하는 등 당시 일본 미술계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작품의 특징은 황토색을 주종으로 한 ‘소’를 통해 민족 정서, 생활 정서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소’는 작업의 일관된 모티프였으며 그 외에도 ‘불상’, ‘여인’ 등을 다루었다. 조형적으로는 선묘와 색채가 강조된 구상화와 반추상화를 넘나들었다. 평생 실향민으로서 화단의 주류를 비켜선 재야 화가로서 풍운아처럼 떠돌며 살면서도 부산에 정착한 이후 송혜수미술연구소를 차려 후진양성에 힘썼다. 또한 92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 사재를 털어 송혜수미술상 기금을 마련하여 해마다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부산미술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1913년 평안남도 평양의 개화(開化)한 집안에서 2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평양에서 서당, 상수보통학교, 숭인고등보통학교를 다닌 뒤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1938년 도쿄 데이코쿠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5년 후인 1943년에 졸업했다. 유학을 마치고 만주에 머물다가 해방 후 서울에서 8.15 해방을 맞이했고,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남한에 정착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피난하여 그곳에 정착한 후 평생을 살았다.
동경제국미술학교 재학 시에 동경유학생들의 모임인 ‘백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젊은 작가들, 재야미술인들의 활동공간인 ‘독립미술협회전’에서 입선하는 등 당시 일본 미술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당시의 작품 성향은 소나 말을 주제로 하고 황토색을 주종으로 한 표현주의적, 초현실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이를 통해 망국의 설움과 절망을 담고자 했다. 대학 졸업 후 일제의 징용을 피해 만주에 머물다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다. 해방 공간의 미술계가 대한미협과 미술협회로 양분되어 있을 때 송혜수는 김환기, 김병기, 장욱진, 김영주, 남관 등과 일종의 재야파 미술가들의 모임인 ‘50년 미술협회’를 결성했다. 6.25전쟁의 발발로 활동을 지속하지는 못했으나 의욕적인 활동 의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6·25전쟁 시기에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로서 장욱진, 한묵과 함께 ‘종군 스케치 3인전’(1951)을 여는 등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참담한 시대상을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이후 부산에 자리를 잡고 부산작가로 활동하면서 재야파로 남았으나 1972년에는 한국신자유미술가회를 창립하여 활동 반경을 다지기도 했다. 또한 송혜수미술연구소를 통해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고, 2005년 타계 직전에는 사재를 들여 ‘송혜수미술상’을 제정하여 후배 작가들의 활동을 독려하는 등 한국미술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동경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인 1941년에는 독립미술협회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바 있고, 1942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2점이 입선, 1943년에는 역시 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6점이 입선하고 본상을 수상하여 일찍부터 재능과 역량을 인정받았다. 2001년에 동다송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5년에 타계한 후 그 해에 송혜수미술상이 제정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아트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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