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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송병선 淵齋 宋秉璿Song ByeongSeon
1836 ~ 1905
조선
작가약력
- 1836(헌종 2)∼1905. 조선 말기의 학자·순국지사.
작가 소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대전시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면수(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병순(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달수에게서 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1877년(고종 14)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緦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를 올렸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그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과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 병순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5년에 충청남도 대전 보문산으로 이전하였다.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곳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1877년(고종 14)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緦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를 올렸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그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과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 병순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5년에 충청남도 대전 보문산으로 이전하였다.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곳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