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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산 김도현 碧山 金燾鉉Kim DoHyeon

1852 ~ 1914

조선

작가약력

  • 1852(철종 3)~1914.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작가 소개

김도현(金燾鉉)의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명옥(明玉), 호는 벽산(碧山)이며, 도현(道鉉)이란 이름도 사용하였다. 사육신(死六臣)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이다. 1852년 7월 14일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에서 아버지 김성하(金性河)와 어머니 한양조씨(漢陽趙氏)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1월에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도현은 아우 김동현(金東鉉)과 일가 및 마을 사람들을 모아, 1896년 1월 4일 경상북도 봉화군 청량산(淸凉山)으로 들어가 청량의진(淸凉義陣)을 일으켰다. 청량의진을 일으킨 뒤 선성의진(宣城義陣)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태봉전투를 치렀다. 또한 강릉의진(江陵義陣)과 연합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관군과 전투를 치른 뒤 영양으로 회군하였다. 김도현은 소청리(小靑里) 검산성(劍山城)에 본진을 두고 각지의 의병을 모아 진영을 꾸렸다. 그러나 관군의 출동으로 본진이 무너지자, 군세를 정비하고 유격전으로 전환하였다.
1896년 6월 3일에는 영덕 지역에서 연합 작전을 펼치기 위하여 영해(寧海)로 진군하였다. 이 무렵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도 경주(慶州)·흥해(興海)를 거쳐 영덕으로 들어왔으며, 영덕의병장 신운석(申運錫)도 합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6월 3~4일 사이 영덕 남천쑤 전투에서 의병이 패하고 김하락도 투신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도현은 영양으로 회군하였다. 6월 10일 청송(靑松)으로 들어갔으나, 청송의진이 화전등전투(花田燈戰鬪)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영양으로 회군하였다. 9월 9일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1906년 1월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1906년 가을 고종의 밀칙(密勅)을 받고 의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으며,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09년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썼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스승 이만도(李晩燾)가 단식으로 저항하다 순국하였다. 이때 함께 자결하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기에 뜻을 미루었다.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상례를 치른 후 1914년 음력 11월 3일 집을 나섰다. 11월 5일 울령(鬱嶺)에서 시 한 수를 남기고, 11월 6일 반송정 여사(旅舍)에 이르러 동포에게 알리는 유서를 남겼다. 그리고 영덕 관어대(觀魚臺) 아래 대진의 산수암(汕水岩)에 가서 절명시(絶命詩)를 지었다. 11월 7일[양력 12월 23일] 동짓날 일출을 기다린 후 진시(辰時)에 산수암에서 대진 앞바다 를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가 사망하였다.
1915년 3월 13일에 김도현이 순국한 산수암에 ‘도해단(蹈海壇)’과 ‘도해비(蹈海碑)’를 세웠으나,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1950년 4월 ‘도해비영립계(蹈海碑營立稧)’가 조직되었으며, 1971년에는 ‘도해비복구기념사업회(蹈海碑復舊記念事業會)’를 결성하였다. 1974년 김도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벽산 김도현선생숭모회가 조직되었다.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영덕대게로 2762[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278-1]에 있는 도해단은 1971년에 건립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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