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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 길선주 靈溪 吉善宙Gil SeonJu

1869 ~ 1935

조선·근대

작가약력

  •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 7인의 목사 중 1인.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1인.

작가 소개

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 평안남도 안주 출신. 아버지는 봉순(鳳順)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시화에 능했고, 음악을 좋아했다.
힘이 장사였던 그는 19세부터 차력술을 연마하던 중, 25세 때 친구로부터 선도(仙道)로 장사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입산하여 3년을 힘썼으나, 신통한 것을 얻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때 자기에게 선도를 권했던 김종섭(金鍾燮)을 만나, 그로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는 이야기와 그가 권하는 한문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천로역정(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1897년 29세 때 세례를 받고, 1898년에는 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조사가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을 맡아 전도하였다.
한편, 정국의 혼란과 국운의 비극을 염려하여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 사업부장을 맡아 구국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기독교신앙운동을 통해 구국의 길을 찾을 결심으로,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장대현교회 건물을 세웠다.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07년 제1회 졸업생으로 7명의 동료와 함께 독로회(獨老會)에서 안수를 받고 장대현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는 열정적인 목회자로, 부흥사로 활약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고 부흥운동을 통하여 심령의 역사를 크게 나타내었으며,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특히 그는 1907년에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영향으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국교회의 현대화와 토착화를 위해서도 크게 노력하였는데, 그 당시의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해, 교회당 안에 설치된 남녀 좌석 사이의 휘장을 철거케 하였다. 또한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으로 도입하여 행사 때나 교회 명절에 연주하게 하였고, 찬양대와 교회음악단을 조직하여 교회선교활동을 활성화시켰다.
연극과 성화(聖畵)에도 관심을 두어, ‘성극의 밤’을 열기도 하였다. 1910년 제4회 노회에서 1백만 구령운동을 제창하여, 국권상실의 수치와 비운에 빠진 민족을 구령으로 위로하고 민족의 최후 보루를 교회에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애국정신으로 1912년 105인사건 때에는 많은 애국지사와 함께 수난당하였고, 장남을 잃는 고통을 겪은 뒤 성서 연구에 몰두, 신 · 구약성서의 주석서를 많이 남겼다.
교육사업에도 힘써 숭실학교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하였고, 3 · 1운동 때에는 기독교를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석방된 뒤로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저서로 『해타론』과 『만사성취』가 있고, 유고로 『말세학』 · 『길선주목사설교집』 등을 남겼다.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작가의 경매 작품

제62회 가을경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