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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 권벌 冲齋 權橃Kwon Beol
1478 ~ 1548
조선
작가약력
- 1478(성종 9)~1548(명종 3). 조선 전기 의정부좌참찬, 의정부우찬성, 원상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작가 소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 훤정(萱亭) · 송정(松亭). 할아버지는 부호조(副護早) 권곤(權琨)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권사빈(權士彬)이며, 어머니는 주부(主簿) 윤당(尹塘)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서 예문관검열 · 홍문관수찬 · 부교리 ·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 · 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다.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고, 이어서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영천군수로 부임하였다. 1517년 장령을 역임하고,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 · 좌승지 · 도승지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 예조참판에 임용되었다.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다는 이유로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1519년 11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15년 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임명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 이듬 해 2월에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39년 3월 병조참판에 임용되고, 6월에는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7월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2월에 돌아왔다.
1540년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에 임용되었으며, 1541년 5월 예조판서, 11월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2년 5월 장령이 되었으며, 1544년 정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5년(인종 1년)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고, 7월에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1545년 8월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의 세력을 배척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 · 유인숙(柳仁淑) · 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9월 우의정 이기와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削勳)되었고, 10월에는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이어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移配)되었으며, 이듬 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직기간 동안 그는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 참찬관(參贊官) 등을 역임하며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중종 대에는 조광조 ·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 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 속에 지니고 다녔으며, 저서로는 『충재문집(冲齋文集)』이 있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서 예문관검열 · 홍문관수찬 · 부교리 ·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 · 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다.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고, 이어서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영천군수로 부임하였다. 1517년 장령을 역임하고,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 · 좌승지 · 도승지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 예조참판에 임용되었다.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다는 이유로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1519년 11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15년 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임명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 이듬 해 2월에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39년 3월 병조참판에 임용되고, 6월에는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7월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2월에 돌아왔다.
1540년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에 임용되었으며, 1541년 5월 예조판서, 11월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2년 5월 장령이 되었으며, 1544년 정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5년(인종 1년)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고, 7월에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1545년 8월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의 세력을 배척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 · 유인숙(柳仁淑) · 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9월 우의정 이기와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削勳)되었고, 10월에는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이어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移配)되었으며, 이듬 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직기간 동안 그는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 참찬관(參贊官) 등을 역임하며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중종 대에는 조광조 ·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 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 속에 지니고 다녔으며, 저서로는 『충재문집(冲齋文集)』이 있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