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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 이항복 白沙 李恒福Lee HangBok

1556 ~ 1618

조선

작가약력

  •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齊賢)의 방손(傍孫)이며, 이성무(李成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예신(李禮臣)이고, 아버지는 참찬 이몽량(李夢亮)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현감 최륜(崔崙)의 딸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우정과 해학이 얽힌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이의 문하로 서인에 속했다. 이후 저작(著作)·박사·정언(正言)·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호종하여 의주로 갔으며, 전란 중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한음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병조판서를 맡아 전란을 지휘하는데 앞장섰다. 1598년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발생하자 목숨을 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으로 전란을 무사히 극복하여 그 공로가 인정되었으며 1599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 강경 대북파가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 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귀양 가는 길에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시조가 유명하다.

《철령 높은 봉에》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었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서울 부암동에는 이항복의 별장 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있으며 이 계곡을 ‘백사실계곡’이라고 부른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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