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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북 신광수 石北 申光洙Shin GwangSu
1712 ~ 1775
조선
작가약력
- 1712(숙종 38)∼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인.
작가 소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 또는 오악산인(五嶽山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신호(申澔)이며,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郎) 이휘(李徽)의 딸이다.
집안은 남인으로 초기에는 벼슬길이 막혀 향리에서 시작에 힘썼다. 채제공(蔡濟恭)·이헌경(李獻慶)·이동운(李東運)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윤두서(尹斗緖)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신광수는 39세 때에 진사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다. 49세에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郎)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표류하였다. 제주에 40여 일 머무르는 동안에 「탐라록(耽羅錄)」을 지었다. 그 뒤에 선공봉사(繕工奉事)·돈녕주부(敦寧主簿)·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신광수는 1772년 61세 때에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에서는 문장의 신하를 얻었다고 하였다. 영조는 그를 대단히 대우하여 그가 서울에 거주할 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집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 뒤에 우승지·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신광수는 과시(科詩)에 능하여 시명이 세상에 떨쳤다. 그의 시인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關山戎馬로 약칭됨.)는 창(唱)으로 널리 불렸다. 그는 사실적인 필치로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농촌의 피폐상과 관리의 부정과 횡포 및 하층민의 고난을 시의 소재로 택하였다.
악부체(樂府體)의 시로서는 「관서악부(關西樂府)」가 유명하다. 신광수의 시에 대하여 교우 채제공은 “득의작(得意作)은 삼당(三唐)을 따를만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능가하며 동인(東人)의 누습을 벗어났다.”고 평하였다. 그는 동방의 백낙천(白樂天)이라는 칭을 받기도 하였다.
신광수의 시는 그 시대의 현실을 담고 있거나 우리 나라의 신화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민요풍의 한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한문학사상 의의가 매우 크다. 저서로 『석북집』 16권 8책과 『석북과시집』 1책이 전한다.
집안은 남인으로 초기에는 벼슬길이 막혀 향리에서 시작에 힘썼다. 채제공(蔡濟恭)·이헌경(李獻慶)·이동운(李東運)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윤두서(尹斗緖)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신광수는 39세 때에 진사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다. 49세에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郎)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표류하였다. 제주에 40여 일 머무르는 동안에 「탐라록(耽羅錄)」을 지었다. 그 뒤에 선공봉사(繕工奉事)·돈녕주부(敦寧主簿)·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신광수는 1772년 61세 때에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에서는 문장의 신하를 얻었다고 하였다. 영조는 그를 대단히 대우하여 그가 서울에 거주할 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집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 뒤에 우승지·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신광수는 과시(科詩)에 능하여 시명이 세상에 떨쳤다. 그의 시인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關山戎馬로 약칭됨.)는 창(唱)으로 널리 불렸다. 그는 사실적인 필치로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농촌의 피폐상과 관리의 부정과 횡포 및 하층민의 고난을 시의 소재로 택하였다.
악부체(樂府體)의 시로서는 「관서악부(關西樂府)」가 유명하다. 신광수의 시에 대하여 교우 채제공은 “득의작(得意作)은 삼당(三唐)을 따를만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능가하며 동인(東人)의 누습을 벗어났다.”고 평하였다. 그는 동방의 백낙천(白樂天)이라는 칭을 받기도 하였다.
신광수의 시는 그 시대의 현실을 담고 있거나 우리 나라의 신화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민요풍의 한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한문학사상 의의가 매우 크다. 저서로 『석북집』 16권 8책과 『석북과시집』 1책이 전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