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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어 김진상 退漁 金鎭商Kim JinSang

1684 ~ 1755

조선

작가약력

  • 1684(숙종 10)∼1755(영조 31). 조선 중기~후기의 문신·서예가.

작가 소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退漁). 김반(金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김익훈(金益勳)이고, 아버지는 김만채(金萬埰)이며, 어머니는 이항(李杭)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 진사가 되고 1712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說書)·지평(持平)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720년 홍문록에 올라 수찬(修撰)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옥사로 무산(茂山)에 유배당하였으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이조정랑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수찬·필선(弼善)·부교리(副校理) 등을 역임하던 중 1729년(영조 5)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실시된 탕평책에 반발하여 퇴거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환로에 진출하여 1735년 부제학(副提學), 1738년 대사성, 1740년 대사헌을 거쳐 1753년 좌참찬에까지 이르렀다.
1716년 병신처분(丙申處分) 뒤 윤선거(尹宣擧)의 서원과 문집목판을 훼철할 것을 청하였으며 1719년에는 희빈장씨(禧嬪張氏)의 묘를 이장할 때 동궁이 망곡(望哭: 먼 곳에서 어버이의 상사에 대해 그곳을 향해 슬피우는 일)하려는 것을 막는 등 과격한 노론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글씨를 잘 써 당대에도 이름이 높았다. 당시 노론 인사들의 비문을 많이 썼다고 한다. 비문은 이의현(李宜顯)과 이재(李縡)의 문장으로 하고, 필(筆)은 김진상의 글씨를 구했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당시 비판(碑板)에 이재의 문장과 김진상의 글씨가 아니면 쓰지를 않았다고 할 만큼 이재의 문장과 김진상의 글씨가 높게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글씨는 대부분 예서이다. 현존하는 예서 작품은 주로 묘갈명이며, 전액은 주로 유척기가 쓴 것을 볼 수 있다. 김수증 이후 예서비를 가장 많이 쓴 것으로 보인다. 찬자와 서자의 관계는 주로 학맥을 중심으로 한 노론 인사들임을 알 수 있다. 초기 예서 작품으로 1716년의 <김익훈신도비(金益勳神道碑)>가 있는데, 이미 김진상 예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1731년에 세운 <김공묘갈(金公墓碣)>의 예서는 정방형의 자형에 별획은 왼쪽으로 더욱 치켜 올리며 날카롭게 뺐다. 파책은 여전히 율동감 있게 올렸지만 날카로움은 줄어들었다. 또한 해서획의 점획은 송준길의 글씨를 연상케 한다.
1736년의 <최숙사적비>부터는 해를 거듭할수록 필획이 굵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1741년의 <조정만신도비>는 <김공묘갈>의 글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송시열이 문장을 짓고 1744년에 세워진 <홍주성선생유허비(洪州成先生遺墟碑)>는 세로의 시작하는 획에서 해서획이 보이나 전반적으로 예서의 특징을 잘 갖추었다. 편방형에 획은 비교적 가늘고, 파책은 길게 빼어 시원스런 느낌을 준다. 1728년의 <이정룡신도비(李廷龍神道碑)>는 마모가 심해서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으나, <홍주성선생유허비>의 편방형의 자형보다는 정방형의 자형으로 변모된 양상을 보인다. 김진규의 글씨에 비해 좀 더 유려하고 활달하나, 필획이 가는 점이나 자체(字體)는 유사하다.
1746년의 <송규렴신도비(宋奎濂神道碑)>는 절정기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필치를 구사하고 있다. 가로획의 시작부분은 더욱 강조되었으며, 당예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예에서의 영향은 구체적으로 당 현종의 <석대효경(石臺孝經)>과 비교해 볼 수 있다. 특히 ‘성(成)’자 등에 보이는 것과 같이 왼쪽 획을 S자 모양으로 구부려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예인 <하승비>의 구불구불한 획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예 뿐만이 아니라 김수증부터 김진규의 예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았다. 1716년에서 1752년까지 예서작품이 보이는데, 글씨의 변화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별날(撇捺 : 비스듬히 빼는 삐침)의 획을 대칭으로 하였으며 가로획을 물결치듯 그어 율동감이 느껴진다. 획이 비후하며 대칭을 이루었고, 해서의 획이 가미된 당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초서는 글자의 크기는 변화가 많은데 비해 획에서는 변화가 많지 않음을 <서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문집으로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가 전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서화가사전

작가의 경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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