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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한갑 黃韓甲Hwang HanGap

1889 ~ 1982

한국

공예

중요무형문화재 제37호 화장(靴匠)

작가약력

  • 1889(고종 26)~1982. 조선의 마지막 왕실 화장(靴匠).

작가 소개

화장(靴匠)은 가죽·비단 등의 재료로 신발을 제작하는 일 또는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뜻한다. 화장(靴匠, 신의 목이 있는 화(靴)를 제작)과 혜장(鞋匠, 신 목이 없는 혜(鞋)를 제작)으로 활동하였던 사람들을 주피장이라고도 하며, 우리말로는 ‘갖바치’라고 일러왔다.
전통 신발은 그 형식에 따라 크게 화(靴)와 혜(鞋)로 나뉜다. 목이 긴 화는 북방민족들의 방한용에서 비롯되었으며, 혜는 목이 없는 일반적인 신으로 온화한 기후의 남방지역에서 발달하였다. 고구려의 쌍영총(雙楹塚)과 사신총(四神塚) 벽화에도 두 가지 형태의 신발이 모두 보이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신발에 비하여 크게 다르지 않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왕의 혜가 출토된 바 있고, 흥덕왕 때의 복식금제(服飾禁制) 조항에 ‘화대(靴帶)’라는 용어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도 화가 제작되었음을 말해 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화장은 조선 초부터 경공장으로서 공조에 6명, 상의원에 10명이 각각 소속되어 있었다. 현재는 화장(靴匠)과 혜장(鞋匠)을 통칭하여 화혜장(靴鞋匠)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전통 가죽신을 제작하는 장인을 총칭하여 화장으로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관대에 갖추어 신던 목화(木靴)를 주로 제작하였고, 기타의 신은 삽혜장(靸鞋匠)이 제작을 전담하였다. 그리고 앞코 언저리에 놓이는 당초나 꽃문양은 화아장(花兒匠)의 분업으로 이루어졌다. 목화는 장화처럼 목이 긴 신으로 바닥의 나무를 깎아내고, 신목은 검게 염색한 녹비[鹿皮]나 검은색 융을 쓰며, 솔기(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에는 홍색 천을 둘렀다.
옛 신발의 종류는 대략 남녀와 신분에 따라 달라지며, 일기조건에 맞추어 진신과 마른신을 갖추어 신었다. 특히, 신분적 위계와 남녀의 구별이 강조되었던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신발의 종류가 각각의 처지에 맞게 사용되었다. 왕과 내시·노인용의 건혜(乾鞋), 기름먹인 유혜(油鞋), 당초문이 수놓인 당혜(唐鞋) 및 아혜(兒鞋)·마혜(麻鞋)·목혜(木鞋)·백혜(白鞋)·적석(赤舃)·태사혜(太史鞋) 등과, 여성용으로는 앞코에 구름문양이 있는 운혜(雲鞋), 노파용의 왼궁혜·반궁혜, 볼이 넓은 여염집 여인용의 계혜, 기생들이 신던 기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태사혜는 가죽과 비단으로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신으로서, 울타리와 코언저리에 박는 눈의 색채 조화에 따라 여러 종류로 다시 나뉜다.
또한, 비올 때 신는 진신은 비단을 쓰지 않고 부드러운 사슴가죽을 겉가죽으로 하여 외형을 만들고, 방수효과를 위하여 끓여서 식힌 들기름에 담갔다가 꺼낸 다음, 기름기가 빠지기를 기다려 장지(壯紙)에 싸서 미지근한 방에 하루쯤 재워 완성한다.
신발 제작에 쓰이는 도구로는 신골·볼과 실판으로 만든 백비판, 배나무로 된 칼판, 창뚫이판, 풀을 갤 때 쓰는 풀널과 풀대, 그리고 대추나무방망이·마나무·큰칼·작은칼·송곳·제모·왜기·버팀목·숫돌·반계·객도 등이 있다.
생활양식이 크게 바뀐 근대기를 거치면서 다른 공예기술 분야보다 타격이 심하였던 화장분야는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바 있으나, 서양문물이 유입하면서 구두를 비롯한 서양식 신발이 주류를 이룸에 따라 갖바치의 명맥도 거의 끊어졌다. 이후 조선의 마지막 왕실 갖바치를 지낸 황한갑(黃漢甲)이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화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그의 사망 이후 전승의 맥이 사실상 단절되어 왔었다. 그러나 황한갑의 손자인 황해봉(1956~ ) 씨가 기능을 연마하여 2004년 2월 2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기능보유자로 인정된 바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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