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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헌 권진응 山水軒 權震應Kwon JinEung

1711 ~ 1775

조선

작가약력

  • 1711(숙종 37)~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수헌(山水軒)이다. 그는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자로, 아버지는 제주 목사 권정성(權定性)이다.
어려서부터 한원진의 문하에서 독서에 전념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으나, 의정부 대신들과 이조의 당상관들이 모여 인재를 추천하는 초선(抄選)으로 시강원의 정7품 자의(諮議)에 임명되었다. 1771년(영조 47)에 영조의 『유곤록(裕昆錄)』을 소론(疏論)하여 증조부 권상하를 신소(申訴)하였다가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었다. 이듬해인 1772년(영조 48)에 연로한 나이로 특별 사면되어 해배되었고, 몇 해 후인 1775년(영조 51) 병으로 사망하였다.
1771년(영조 47)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으로 배척한 『유곤록』을 만들자, 상소를 올려 이를 논하면서 증조부 권상하를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그해 3월 14일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는 대정현 창천리[오늘날 서귀포시 안덕면] 강필발(姜弼發)의 집이었다. 그는 스스로 호를 ‘산수헌’이라 하고 거처하는 집을 ‘창주정사(滄州精舍)’라 칭하였다. 창주는 ‘은자가 사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 주자(朱子)가 창주에 정사를 짓고 학문을 강론한 데서 차용하였다. 그는 배소 근처 언덕의 바위에 자주 올랐는데, 시야가 확 트여 용연(龍淵)과 포구가 빗겨 보이는 전망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이 제주도 유배 중에 거처하였던 배소를 돌아본 후, 제주도 유림들에게 유허비 건립을 제안하고 자신이 직접 비문을 썼다. 그 때 세워진 유허비는 제주시 오현단(五賢壇)에 현재까지 남아있다. 1772년(영조 48)에 연로한 나이로 특별 사면을 받아 해배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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