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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孫基禎Sohn KeeChung
1912 ~ 2002
한국
체육
작가약력
-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 해방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육상경기연맹 회장 등을 역임한 체육인.
작가 소개
손기정은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으며, 소학교 6학년 때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안의육상경기대회(安義陸上競技大會)에 출전하여 청장년을 누르고 5,000m 달리기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마라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1931년 조선신궁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5,000m 달리기에 출전하여 2위를 하였고, 1932년 동아일보사 주최 경영(京永)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육상 명문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양정고등보통학교 입학 후 1932년 4월 일본 호오치신문사 주최 동경-요꼬하마간 역전경주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1933년 3월 고려육상경기회(高麗陸上競技會) 주최 제3회 15마일 크로스컨트리경주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각종 장거리경주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에는 제10회 조선신궁대회의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하였다. 1935년 3월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파견 후보 1차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기록으로 우승했고, 4월에 개최된 조선마라톤선수권대회에서도 2시간 25분 15초로 우승했으며, 11월에 개최된 메이지신궁대회 겸 올림픽 선발 2차전에서도 2시간 26분 41초로 우승했다. 다음해 5월에 개최된 최종전에서는 1위의 남승룡(南昇龍) 선수에 이어 2위를 하였고, 일본 선수들이 3위와 4위를 하였다. 이에 일제는 올림픽에 일본 선수를 내보내기 위해 베를린에서 20㎞로 최종 평가전을 하도록 하였다. 최종평가전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1위와 2위를 하여 올림픽에 출전하였으며, 손기정은 1936년 8월 9일 밤 11시(한국 시간)에 거행된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공인된 세계 최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올림픽이 끝난 10여 일 후 동아일보의 이길룡(李吉用) 기자가 이상범(李象範) 기자 등과 더불어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의 왼쪽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운 후 그 사진을 1936년 8월 25일자 석간으로 배포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이다.
광복 후에는 1948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 육상경기연맹 회장 등을 역임했고, 1966년부터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 한국대표선수단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88올림픽 서울 유치를 위한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서울올림픽경기대회조직위원회 위원으로서 우리나라의 체육발전을 위해 활약했다.
한편, 손기정의 저서로는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 있다.
손기정은 주권이 상실된 시대에 진정한 한국인의 모습을 세계 여러 나라에 소개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뛰었고,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경기대회의 사인북에는 한글로 ‘손기정’이라 쓰고 ‘Korea’라고 적었다. 그는 이에 대해 “한문으로 이름을 적지 않은 것은 일본인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Korea라고 적은 것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또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부상으로 받게 돼 있던 그리스 투구를 각고의 노력 끝에 1986년 베를린올림픽 50주년 기념행사 직전에 베를린에서 반환받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암울한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 ‘Korea’, ‘대한민국’이 존재함을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이러한 노력의 결과 독일, 미국 등 세계 각국이 손기정의 국적이 Korea라고 인정하게 되었고,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Korean Marathon Runner라는 이름으로 손기정을 소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제2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1970년)을 받았다.
양정고등보통학교 입학 후 1932년 4월 일본 호오치신문사 주최 동경-요꼬하마간 역전경주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1933년 3월 고려육상경기회(高麗陸上競技會) 주최 제3회 15마일 크로스컨트리경주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각종 장거리경주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에는 제10회 조선신궁대회의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하였다. 1935년 3월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파견 후보 1차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기록으로 우승했고, 4월에 개최된 조선마라톤선수권대회에서도 2시간 25분 15초로 우승했으며, 11월에 개최된 메이지신궁대회 겸 올림픽 선발 2차전에서도 2시간 26분 41초로 우승했다. 다음해 5월에 개최된 최종전에서는 1위의 남승룡(南昇龍) 선수에 이어 2위를 하였고, 일본 선수들이 3위와 4위를 하였다. 이에 일제는 올림픽에 일본 선수를 내보내기 위해 베를린에서 20㎞로 최종 평가전을 하도록 하였다. 최종평가전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1위와 2위를 하여 올림픽에 출전하였으며, 손기정은 1936년 8월 9일 밤 11시(한국 시간)에 거행된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공인된 세계 최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올림픽이 끝난 10여 일 후 동아일보의 이길룡(李吉用) 기자가 이상범(李象範) 기자 등과 더불어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의 왼쪽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운 후 그 사진을 1936년 8월 25일자 석간으로 배포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이다.
광복 후에는 1948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 육상경기연맹 회장 등을 역임했고, 1966년부터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 한국대표선수단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88올림픽 서울 유치를 위한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서울올림픽경기대회조직위원회 위원으로서 우리나라의 체육발전을 위해 활약했다.
한편, 손기정의 저서로는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 있다.
손기정은 주권이 상실된 시대에 진정한 한국인의 모습을 세계 여러 나라에 소개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뛰었고,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경기대회의 사인북에는 한글로 ‘손기정’이라 쓰고 ‘Korea’라고 적었다. 그는 이에 대해 “한문으로 이름을 적지 않은 것은 일본인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Korea라고 적은 것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또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부상으로 받게 돼 있던 그리스 투구를 각고의 노력 끝에 1986년 베를린올림픽 50주년 기념행사 직전에 베를린에서 반환받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암울한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 ‘Korea’, ‘대한민국’이 존재함을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이러한 노력의 결과 독일, 미국 등 세계 각국이 손기정의 국적이 Korea라고 인정하게 되었고,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Korean Marathon Runner라는 이름으로 손기정을 소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제2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1970년)을 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