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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 이정직 石亭 李定稷Lee JeongJik

1841 ~ 1910

조선

서화

작가약력

  • 1841(헌종 7)~1910. 조선 말기~근대의 학자·서화가.

작가 소개

자는 형오(馨五), 호는 석정(石亭) · 석정산인(石亭山人) · 연석(燕石),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상원(李上垣)의 후손으로 이정직의 집안은 경기도 김포에서 대대로 거주했으나, 선략장군사과(宣略將軍司果)를 지낸 부친 이계환(李啓煥)이 시국의 참상을 보고 김제(金堤)로 이거하였다. 1841년 음력 6월 3일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여꾸[요교(蓼橋)]마을에서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학문을 즐겨 강회민(姜會民) · 안정봉(安廷鳳)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의 정통학문 이외에도 음양(陰陽) · 복서(卜筮) · 성력(星曆) · 율려(律呂) · 산학(算學) · 명물(名物) · 기계(機械) · 도화(圖畵)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심취한 실학자였다. 더구나 서양철학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칸트(Kant)와 베이컨(Bacon)의 철학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근대적 철학자이기도 하다. 칸트 철학을 주자학과 비교분석한 『칸트철학연구평론』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이정직은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는데, 1869년 28세 때에 연경사(燕京使)인 어영대장 이봉구의 수행원으로 북경에서 1년간 체류하고 돌아온 후 사상적 기반과 학문, 예술은 더욱 풍부해졌다.
이정직의 서예는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에 미불(米芾)과 동기창(董其昌)의 행서를, 때로는 안진경(顔眞卿)의 해서와 행서를 접목시켜 또 다른 행초의 세계를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즉 왕희지를 근본으로 하는 미불과 동기창 중심의 전통적인 첩학파(帖學派) 계열의 해서나 행서계통의 서체나 서풍을 견지함으로써,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전통 유학자이면서 신문물의 흡수에도 열을 올린 신지식인으로서 지적 호기심이 지대한 인물이었던 이정직이 당시 전예(篆隸)나 육조해(六朝楷) 계통의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서풍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이다.
이정직의 회화는 숙련된 서예의 필치와 학문의 심오함을 통해 이루어진 문인화였다. 실천적 학문과 다방면에 걸친 관심이 보여주듯 그는 회화에서도 사군자와 괴석 뿐 아니라 기명절지(器皿折枝) 등 문인화의 다양한 소재를 두루 다루었다. 이정직의 서화는 당대 뿐 아니라 이후 전북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예술적 영향은 기법이나 구도의 특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화정신을 일깨워준 데에 있었으며, 특히 전북 화단에 문인화의 흐름을 형성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정직의 문하에서 서예활동을 한 문인들이 대단히 많았는데, 대표적인 서화가로는 조주승(趙周昇) · 박규환(朴奎煥) · 유영완(柳永完) · 송기면(宋基冕) 등을 들 수 있다. 문집으로 『석정이정직유고(石亭李定稷遺藁)』가 있다.
출처/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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