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 Service
- 작가검색
심산 김창숙 心山 金昌淑Kim ChangSook
1879 ~ 1962
한국
작가약력
- 1879(고종 16)∼1962. 유학자·독립운동가·정치인.
작가 소개
경상북도 성주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 일제의 감시 아래 한때는 우(愚)로 개명하였고, 일제의 고문으로 다친 뒤에는 벽옹(躄翁)이라는 별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호림(頀林)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곽종석(郭鍾錫)과 이승희(李承熙)의 문인이다.
3·1운동 후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
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그 기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내부의 파쟁조정에 힘썼다. 자신의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손문(孫文)을 비롯한 중국 국민당의 인사들과 교류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독립후원회와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를 결성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써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영어·중국어 강습을 받도록 주선하였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영국인 병원에서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고, 그 뒤 14년의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중투쟁과 일본경찰의 고문에 의해 두 다리가 마비되어 형집행정지를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정치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김구(金九)와 함께 민족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승만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6·25 한국전쟁 이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의 정치파동 때에는 이시영(李始榮)·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끝내 이승만정권과 투쟁하였다.
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심산만초(心山謾草)』와 『벽옹만초(躄翁謾草)』, 자서전인 『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가 있다. 1973년 김황(金榥)이 이들을 편집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심산유고(心山遺稿)』를 간행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3·1운동 후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
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그 기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내부의 파쟁조정에 힘썼다. 자신의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손문(孫文)을 비롯한 중국 국민당의 인사들과 교류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독립후원회와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를 결성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써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영어·중국어 강습을 받도록 주선하였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영국인 병원에서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고, 그 뒤 14년의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중투쟁과 일본경찰의 고문에 의해 두 다리가 마비되어 형집행정지를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정치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김구(金九)와 함께 민족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승만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6·25 한국전쟁 이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의 정치파동 때에는 이시영(李始榮)·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끝내 이승만정권과 투쟁하였다.
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심산만초(心山謾草)』와 『벽옹만초(躄翁謾草)』, 자서전인 『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가 있다. 1973년 김황(金榥)이 이들을 편집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심산유고(心山遺稿)』를 간행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