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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광 승찬 스님 廻光 僧讚SeungChan Buddhist Monk
1924 ~ 1996
한국
작가약력
- 1924~1996 . 승려.
작가 소개
송광사 조계총림(曹溪叢林) 방장(方丈). 성은 김(金)씨이며 본관은 연안(延安). 법호는 회광(廻光)이며 아호는 승찬(僧讚), 법명은 일각(一覺). 어렸을 때 이름은 인건(寅健)이다. 평안남도 개천 출생. 아버지 김재혁(金在爀), 어머니 이연희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6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중퇴하고 1947년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효봉(曉峰)을 은사로 탄허(呑虛)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한때 평양 죽남국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그는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경전, 불교소설 등을 탐독하다가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1955년 2월 15일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은 그는 출가 이후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12하안거를 보내기도 하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동화사 금당선원(立繩)을 지냈으며, 미래사(彌來寺) 주지(1960), 충무 용화사(龍華寺) 주지(1962∼1984) 등을 각각 지냈다.
1968년에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개최된 제10차 세계불교도우의회(WFB)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WFB의 초청으로 1970년까지 3년간 태국·인도 등 동남아 국가에서 전통 계맥(戒脈)을 연구하였다.
귀국 이후 태국 승려 10명을 통도사 금강계단에 초청하여 불교 국제교류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과 중앙감찰위원을 역임(1970∼1974)하는 한편, 1971년 1월부터 1973년 7월까지 송광사 주지를 지냈으며 1984년 4월 25일 조계총림 제3대 방장에 취임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전국 불일회(佛日會) 총재와 효봉문도회 문장(門長)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1987년 송광사 부설 연구기관인 보조사상연구원의 총재가 되었으며, 1990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이 되었고 1994년 조계총림 제4대 방장으로 다시 추대되었다.
1995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개최된 단일 수계 산림에서 증사(證師)의 자리를 맡기도 했다.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세속 나이 73세, 법랍 50년으로 입적하였다.
송광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을 늘 강조하면서 철저한 수행과 지계행(持戒行)으로 존경받던 그는 24절로 된 ‘오계(五戒)의 노래’를 직접 지어 보급했으며, ‘큰스님의 노래’를 만들어 수행자의 자세를 경책하기도 하였다. 입적시에 남긴 임종게(臨終偈)는 다음과 같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곧 생사요/ 일어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생사와 열반이 누구를 말미암아 있는 일이냐/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손등과 손바닥이니라(念起念滅卽生死/ 無起無滅卽涅槃// 生死涅槃誰由事/ 古往今來手裏掌).”
1946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중퇴하고 1947년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효봉(曉峰)을 은사로 탄허(呑虛)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한때 평양 죽남국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그는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경전, 불교소설 등을 탐독하다가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1955년 2월 15일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은 그는 출가 이후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12하안거를 보내기도 하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동화사 금당선원(立繩)을 지냈으며, 미래사(彌來寺) 주지(1960), 충무 용화사(龍華寺) 주지(1962∼1984) 등을 각각 지냈다.
1968년에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개최된 제10차 세계불교도우의회(WFB)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WFB의 초청으로 1970년까지 3년간 태국·인도 등 동남아 국가에서 전통 계맥(戒脈)을 연구하였다.
귀국 이후 태국 승려 10명을 통도사 금강계단에 초청하여 불교 국제교류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과 중앙감찰위원을 역임(1970∼1974)하는 한편, 1971년 1월부터 1973년 7월까지 송광사 주지를 지냈으며 1984년 4월 25일 조계총림 제3대 방장에 취임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전국 불일회(佛日會) 총재와 효봉문도회 문장(門長)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1987년 송광사 부설 연구기관인 보조사상연구원의 총재가 되었으며, 1990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이 되었고 1994년 조계총림 제4대 방장으로 다시 추대되었다.
1995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개최된 단일 수계 산림에서 증사(證師)의 자리를 맡기도 했다.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세속 나이 73세, 법랍 50년으로 입적하였다.
송광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을 늘 강조하면서 철저한 수행과 지계행(持戒行)으로 존경받던 그는 24절로 된 ‘오계(五戒)의 노래’를 직접 지어 보급했으며, ‘큰스님의 노래’를 만들어 수행자의 자세를 경책하기도 하였다. 입적시에 남긴 임종게(臨終偈)는 다음과 같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곧 생사요/ 일어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생사와 열반이 누구를 말미암아 있는 일이냐/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손등과 손바닥이니라(念起念滅卽生死/ 無起無滅卽涅槃// 生死涅槃誰由事/ 古往今來手裏掌).”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