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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암 박순천 海岩 朴順天Park SunCheon

1898 ~ 1983

근대·현대

작가약력

  • 1898∼1983. 여성정치가.

작가 소개

본관은 밀양(密陽). 본명은 명련(命蓮). 이름 순천(順天)은 독립운동 때 딴 별명. 부산 동래 출신. 아버지 재형(在衡)과 어머니 김춘열(金春烈)의 무남독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2·4·5·6·7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야당지도자로 활약했다.
10세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7년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졸업, 마산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과 연결되어 마산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1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도피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때 ‘순천댁(順天宅)’이라는 별칭을 사용, 그 뒤 ‘박순천’으로 세인의 입에 굳어졌다. 그 해 가을 기녀(妓女)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동경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학교(吉岡女子醫學專門學校)에 들어갔으나 몇 달을 못 다니고 3·1운동 때의 보안법 위반혐의로 다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마산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일본에 유학, 1926년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學)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28세에 동경유학생이던 변희용(卞熙瑢)과 결혼하였다. 경상북도 고령 촌가에 살며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하다가, 1939년 서울에 올라와 조선공예주식회사 금강전구공장 여공감(女工監)으로 근로현장에 있기도 하였다.
1937년에는 황신덕(黃信德)과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을 세워 부교장으로 일했는데, 이 학교가 오늘날의 중앙여자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8·15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建國婦女同盟)을 조직,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에 불복하는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1947년부터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獨立促成愛國婦人會)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학교법인 추계학원(秋溪學園)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8년 『부인신문(婦人新聞)』을 창간, 사장으로 5년 동안 활약하였다. 정부수립 후에는 감찰위원이 되고, 1949년국민회(國民會) 중앙총본부 부위원장과 대한여자청년단(大韓女子靑年團) 단장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대한부인회총본부 회장에 부임해서는 6년간을 재직하였다.
1950년에는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서울 종로 갑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제2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자유당정권과 투쟁하면서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이래 네 차례나 연임하였다.
한편 1958년 제4대, 1960년 제5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으로 거듭 당선되어 여권신장과 민권수호에 앞장섰으며, 제3공화국 때는 민주당 총재를 역임하였고, 1965년에는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당수가 되었으나, 한일회담 비준반대를 위한 의원직총사퇴의 극한투쟁결정에서 강경파인 윤보선(尹潽善)이 탈당하자, 제5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유진오(兪鎭午)에게 당수직을 물려주었다.
1967년 다시 통합야당이 된 신민당(新民黨)의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 5선 의원을 기록하였다. 고령으로 정계를 은퇴한 뒤 1972년 경기도 안양 근명여자상업학교(槿明女子商業學校) 이사장으로 여성교육에 여생을 바치면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 여사 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작가의 경매 작품

제 37회 장터경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