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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석 김종대 我石 金鍾大Kim JongDae

1873 ~ 1949

근대

서화

작가약력

작가 소개

아석 김종대는 1873년 김해 상동면 대감리 외가에서 아버지 창수(昌壽)공과 어머니 분성 배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호 아석은 주자의 싯구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따왔다. '금서(琴書:거문고와 책)를 사십 년 갈고 닦았지만 산중의 객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주자 시의 정취를 호로 가져온 것이다.
아석은 6세 때 부친과 외조부 배환에게 글을 배웠고, 외종조부 차산 배전으로부터 사서삼경과 시문서화(詩文書畵)를 배웠다. 글씨와 그림이 뛰어나 향리에서는 아석을 천재라고 불렀다. 아석의 조부 김규한은 성재 허전의 문도였고, 부친은 대눌·소눌과 벗이었으며, 아석 역시 대눌·소눌에게 학문을 배웠다.
아석은 10대때와 갓 스물에 응시한 과거에 두 번 낙방한 아석은 심기일전 더욱 과거공부에 매진한다. 하지만 갑오년(1894)에 갑오경장이 발표되며, 조선이라는 국호는 사라지고 과거제도는 폐지되며 모든 제도와 법이 서양식으로 바뀌었다.
이 때 흥선대원군이 아석의 서화를 보고 크게 칭찬하며 만나기를 청했다. 대원군은 아석을 불러 손자 준용의 서예공부를 부탁했다. 아석은 대원군과의 교유로 서화 예술에 대한 감각을 더욱 높였다.
29세 때(1904) 법부주사로 등용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나, 31세 때 김해로 낙향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단발령에 항의하여 사직한 것이다. 당시 조정관료들은 단발하고 양복으로 입으라는 명을 받았고, 아석은 고위 간부들로부터 단발을 종용받았다. 아석은 부모의 명을 받고서 시행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사직했다. 동료들 중 홀로 끝까지 단발령을 거부하여 사직한 이 일은 당시 관보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서예도 뛰어나지만, 아석의 사군자화는 '김해 문인화맥'의 전형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아석의 문인화는 차산 배전으로부터 출발하여 대원군을 통해 안목을 넓혔고, 근본적으로 추사 김정희의 서화 정신과 닿아 있다. '남종문인화풍'의 아석 서화예술의 맥은 제자인 수암 안병목에게 이어졌고, 이후 현대의 운정 류필현과 한산당 화엄선사에게 이어졌다.
아석은 만년에 고향인 한림면 수조마을에 강학 서당 '거연정'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했다. 저서로 '아석유고'와 '서소만록' '금강산유람기'를 남겼다.
출처/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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