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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중 이윤용 景中 李允用Lee YunYong

1854 ~ 1939

조선·근대

작가약력

  • 1855(철종 6)∼1938.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의 관료.

작가 소개

본관은 우봉(牛峰, 牛峯). 출신지는 평안도 평양. 자는 경중(景中).
1868년 돈녕봉사, 1869년 별군직, 1880년 양덕현감, 1885년 전라도병마절도사·금군별장·한성부우윤·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1886년 금군별장, 1887년 한성부우윤, 1888년 지의금부사·한성부판윤·영변부사, 1889년 봉산군수·홍주목사로 발령받았다. 1891년 영변부사, 1894년 대호군·형조판서로 임명되었다.
1896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898년 시종원경과 의정부 찬정, 1899년 법부교정소 의정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1900년 인천우선회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15만원을 궁내부에 바쳤다. 이 해 4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3년 경상남도 관찰사·경상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았다. 1904년 중추원의관·전라남도 관찰사·군제의정관·참모부부장·군부대신·관제리정소 의정관 등에 임명되었고, 호남사령관을 겸임을 하였다. 이 해 10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2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5년 중추원찬의·평리원재판장으로 발령받았다. 이듬해 교육과 식산흥업을 목적으로 조직된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 회장을 맡았고, 호남철도회사 사장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1등 팔괘장을 받았다. 또한 이 해에 한성은행의 은행장대리·부은행장이 되었고, 1911년부터 1923년까지 은행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궁내부특진관, 임시서리 시종원경 겸 내대신사무,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되었고, 동우회 회장을 맡았다가 바로 그만두었으며, 얼마 후 적십자사 사장을 겸임을 하였다. 영친왕이 일본을 방문할 때 수행하였다. 이 해 10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태극장을 받았다. 1908년 궁중고문관, 기호흥학회 찬무부 주무원,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 해 1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2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1등 이화대수장을 받았다.
1909년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보부상과 교섭하였고, 내각회의를 거쳐 보부상에게 경비 20만 원을 지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대한상무조합소 총재를 맡았고, 대한상업주식회사를 창립하였으며,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념하기 위하여 설치된 이등공송덕비설립사무소의 부의장을 맡았다. 조선이 일본의 보호를 벗어나 자존 자립할 능력이 없다고 선전하기 위해 조직된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에서 1910년 단장으로 활동을 하였다.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13일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유공회원이 되었고, 일본의 다이쇼대례식에 참석하는 조선귀족의 총대로 선정되었으며,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불교옹호회 고문으로 활동을 하였다. 1919년 경기도 참사로 임명되었고,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과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에 관여하였으며, 이토 사망 10주년을 기리는 ‘고이등박문공10년제’에 참여하여 그의 제단에 참배하였다. 또한 전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義] 분향식’에 참석하였고, 내선융화를 강령으로 하는 친일단체 대정친목회의 평의원회 회장으로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주식회사 경성취인소와 북선흥업철도주식회사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일본 왕세자 가례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본에 출장을 갔고, 이 해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자동철도공업주식회사 찬성인, 조선실업구락부 고문, 매일신보사 주최 부인수예품전람회 고문을 맡았다. 또한 이 해 금배 1개를 받았다. 1921년 친일단체 대정친목회 고문을 맡았고, 경성신사 기원제에 참석하였다. 1922년 평화박람회 조선협찬회 부회장을 맡았고, 대륙공업주식회사 창립위원장·감사로 활동하였다.
1924년 조선불교대회 회장이 되었고, 1925년 조선불교대회를 변경한 재단법인 조선불교단 이사·단장·평의원을 맡았다. 1926년 순종 장례식의 고문 및 배종 감독을 맡았다. 1928년 10월 2일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역임을 하였고, 매년 3,000원씩을 받았다. 또한 1928년 11월 쇼와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30년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을 맡았고, 1934년 조선국방의회연합회·조선사편수회·조선금융조합연합회 등의 고문을 맡았다. 1937년 조선국방협회 설립을 추진하였고, 부인 김씨가 조선 귀족 부인 및 지도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금제품 헌납, 총후보국, 국방헌금 모금 등을 목적으로 조직한 애국금차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중일전쟁 직후 전시체제기로의 이행’에 대한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시국인식 훈시와 간담회에 참석하였다. 도쿄(東京) 제4구 중의원(衆議院) 선거에 입후보한 박춘금(朴春琴)·이선홍(李善洪)을 후원하기 위해 당선후원회를 조직한 후 회장을 맡았다. 1938년 9월 8일 사망 직후 일본 정부로부터 특지로 정3위에 추승되었으며, 이 해 10월 손자 이병옥(李丙玉)이 작위를 물려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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