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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 허유 后山 許愈Heo Yu

1833 ~ 1904

조선

작가약력

  • 1833년(순조 33)∼1904년(고종 41). 조선 후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퇴이(退而), 호는 후산(后山)‧남려(南黎). 조부는 허국리(許國履)이고,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오도리(吾道里)에서 허정(許)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해주정씨(海州鄭氏)로 정산의(鄭山毅)의 딸이다.
그는 1866년(고종 3) 34세에 의령(宜寧)의 미연서원(嵋淵書院)에서 성재(性齋)허전(許傳)을 만났는데, 성재는 후산을 당대의 큰 선비로 인정하였다. 그 해 겨울에 처음으로 한주(寒州)이진상(李震相)을 만났다. 1870년(고종 7)에 성주(星州)로 이진상을 찾아가 주리설(主理說)의 요지를 들었으며, 사흘 동안 태극(太極), 동정(動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등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1877년(고종 14)에 이진상이 오도리로 후산을 방문하였고, 1894년(고종 31)에 윤주하(尹胄夏)와 이진상이 함께 편집한 『이학종요(理學宗要)』를 삼가현의 병목서당(幷木書堂)에서 교정하였다. 또한 한주가 남긴 시문을 성주의 대포서재(大浦書齋)에서 교정하여 문집의 체재로 편집하였다. 1899년(고종 36)에 진주(晉州)의 청곡사(靑谷寺)에서 『남명집(南冥集)』을 교정하였다.
1903년(고종 40)에 조정에서 선비를 우대하는 취지에서 숨은 선비를 찾아 벼슬을 내렸는데, 후산에게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 차례의 제수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지 않았다. 1904년(고종 41)에 후산서당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였다. 이해 6월에 후산의 서쪽 기슭 정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허유는 38세에 한주이진상에게 집지하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한주는 퇴계(退溪)학통의 정맥인 정재(定齋)유치명(柳致明)의 제자이다. 한주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은 퇴계의 주리론을 더욱 발전, 심화시킨 것으로, 후산의 학문은 퇴계에 잇닿아 있다. 그러므로 후산이 평생 퇴계의 학문을 존모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와 교유한 인물들은 박치복(朴致馥), 김인섭(金麟燮), 정재규(鄭載圭), 곽종석(郭鍾錫), 한주의 아들인 이승희(李承熙), 하겸락(河兼洛), 이기상(李驥相), 조성가(趙性家) 등이며 하겸진(河兼鎭), 김성탁(金聖鐸), 김기주(金基周), 이정모(李正模), 이도추(李道樞), 김창숙(金昌淑) 등이 그의 후배이다.
허유는 주리설을 정학(正學)으로 보아 평생 이를 연구, 발양하여 사람들의 심성을 바로잡아 세상을 구제하려고 노력하였다. 또 성리학자들 가운데서는 상당히 특이하게 현실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깊었고 그 대처방안도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국방 및 국가경제, 국제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는 선각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 예로 소금에 대한 감세, 국가의 술의 전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광물질의 채취의 주장 등을 들 수 있다.
후산의 문학관은, 문장은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야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교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은 아무리 많아도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자신도 부화한 수사를 하지 않고 간명하면서도 내용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을 지었다. 그의 시는, 음풍농월적(吟風弄月的)인 것은 거의 없고 유교의 온유돈후(溫柔敦厚)한 시교에 바탕을 둔 자신의 성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래서 아주 화려하거나 사람을 놀라게 할 절묘한 그런 시보다는, 진실한 본성을 그대로 나타낸 충담한 작품이 많다. 후산이 남긴 시문 원고를 그 문인들이 수습하여, 후산이 죽은 지 6년 뒤인 1910년에 목판 19권 10책의 『후산선생문집(后山先生文集)』으로 간행하였다. 그로부터 55년 뒤인 1964년에 문집에 들지 못했던 시문 원고를 정리하여 8권 2책의 『후산선생문집속집(后山先生文集續集)』을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때 후산의 대표적인 저서인 「성학십도부록(聖學十圖附錄)」도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출처/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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