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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불 성관 스님 無佛 性觀SeongGwan Buddhist Monk
1907 ~ 1984
근대·현대
작가약력
- 1907~1984. 승려.
작가 소개
1907년 서울 출생으로 속명은 남점룡(南點龍).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한학(漢學)을 공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법명은 성관(性觀)이고, 무불(無佛)은 법호이다. 스님의 속성(俗姓)은 남(南)이다. 따라서 성과 법호를 함께 사용하면 ‘나무불(南無佛)’이 된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 담긴 이름으로 무불은 금강산에서 대륜(大輪) 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정진할 때 받은 법호이다.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4세 되던 해. 출가 동기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월암(月庵)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사문이 되었다. 동학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불가의 진리를 익히고 사미계를 받았다. 비구계는 1931년 8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스님을 계사로 수지했다.
동학사 백초월(白初月) 스님 문하에서 사집과를 마친 것이 1931년 1월이었다. 이후 금강산으로 주석처를 옮겨 설호(雪湖) 스님에게 사교과를 수료한 때는 1936년 1월이다. 이어 1938년 1월 경성의 개운사에서 박한영(朴漢永) 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마쳤다.
당대 강백들의 지도를 받은 무불 스님은 계룡산 동학사(1940년9월~1943년2월)와 금강산 유점사(1943년2월~1944년1월)에서 강사(講師, 지금의 강주에 해당) 소임을 보며 후학을 가르쳤다. 이른바 대동아 전쟁이라며 침략전쟁에 혈안이 된 일본 제국주의는 젊은이들을 강제동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 전역의 강원을 폐쇄했다. 이때 유점사도 강제 폐문(閉門)이 되어 스님은 강사직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스님은 걸망 하나에 의지한 채 전국을 주유(周遊)했다. 이 과정에서 왜경(倭警)에게 붙잡혀 봉변을 당한 후 몸이 심하게 상했다. 척추를 다친 스님은 이후 사경(寫經)과 참선(參禪)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정진했다.
금강산에서 정진할 무렵 대륜(大輪) 스님을 법은사로 모신 스님은 1951년 부산 동래 금정선원장과 1957년 동래포교당 주지를 지냈다. 1970년 부산 연화사를 창건했고, 1973년 동래 금용암 주지로 포교 일선에서 수행 정진했다.
스님은 1984년 2월 약간의 병환을 보이다, 같은 달 11일(음력)에 원적에 들었다. 법납 64세, 세수 80세. 영결식은 부산 금용암에서, 다비식은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엄수됐다. 스님은 입적을 예감하고 “부처님의 은혜와 시주 은혜를 다 갚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라면서 “사리를 절대 거두지 말라”고 당부했다. 제자로는 종학 스님(부산 불광사)과 지허 스님(김해 황룡사) 등이 있다.
법명은 성관(性觀)이고, 무불(無佛)은 법호이다. 스님의 속성(俗姓)은 남(南)이다. 따라서 성과 법호를 함께 사용하면 ‘나무불(南無佛)’이 된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 담긴 이름으로 무불은 금강산에서 대륜(大輪) 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정진할 때 받은 법호이다.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4세 되던 해. 출가 동기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월암(月庵)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사문이 되었다. 동학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불가의 진리를 익히고 사미계를 받았다. 비구계는 1931년 8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스님을 계사로 수지했다.
동학사 백초월(白初月) 스님 문하에서 사집과를 마친 것이 1931년 1월이었다. 이후 금강산으로 주석처를 옮겨 설호(雪湖) 스님에게 사교과를 수료한 때는 1936년 1월이다. 이어 1938년 1월 경성의 개운사에서 박한영(朴漢永) 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마쳤다.
당대 강백들의 지도를 받은 무불 스님은 계룡산 동학사(1940년9월~1943년2월)와 금강산 유점사(1943년2월~1944년1월)에서 강사(講師, 지금의 강주에 해당) 소임을 보며 후학을 가르쳤다. 이른바 대동아 전쟁이라며 침략전쟁에 혈안이 된 일본 제국주의는 젊은이들을 강제동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 전역의 강원을 폐쇄했다. 이때 유점사도 강제 폐문(閉門)이 되어 스님은 강사직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스님은 걸망 하나에 의지한 채 전국을 주유(周遊)했다. 이 과정에서 왜경(倭警)에게 붙잡혀 봉변을 당한 후 몸이 심하게 상했다. 척추를 다친 스님은 이후 사경(寫經)과 참선(參禪)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정진했다.
금강산에서 정진할 무렵 대륜(大輪) 스님을 법은사로 모신 스님은 1951년 부산 동래 금정선원장과 1957년 동래포교당 주지를 지냈다. 1970년 부산 연화사를 창건했고, 1973년 동래 금용암 주지로 포교 일선에서 수행 정진했다.
스님은 1984년 2월 약간의 병환을 보이다, 같은 달 11일(음력)에 원적에 들었다. 법납 64세, 세수 80세. 영결식은 부산 금용암에서, 다비식은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엄수됐다. 스님은 입적을 예감하고 “부처님의 은혜와 시주 은혜를 다 갚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라면서 “사리를 절대 거두지 말라”고 당부했다. 제자로는 종학 스님(부산 불광사)과 지허 스님(김해 황룡사) 등이 있다.
출처/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