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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 스님 月山WolSan Buddhist Monk

1912 ~ 1997

한국

작가약력

  • 1912∼1997. 승려.

작가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으며 현대 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다. 속성은 최(崔)씨, 본관은 경주. 함경남도 신흥 출생. 아버지는 흥규(興圭)이며, 어머니는 노(魯)씨이다. 어려서의 이름은 종열(鍾烈)이며 유년기에는 고향 서숙(書塾) 등에서 수학하였다. 부친이 사망한 이후 1943년 석왕사(釋王寺) 노승 안광의 소개로 상원사 금초를 만난 인연으로 1944년 망월사를 찾아 당시의 고승인 금오(金烏)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이듬해만공(滿空)을 찾아가 공양주로 한 철을 지내면서 ‘이 뭣고’ 화두(話頭)를 받았으며, 이후 금봉·금오·전강 등의 고승 밑에서 참선수행을 하였다. 수덕사 등지에서 수행 정진하던 그는 한때 문경 봉암사에서 향곡·성철·보문·청담·자운 등과 결사(結社) 수행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결사는 새로운 불교 수행 풍토를 진작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성철을 비롯한 당시의 결사 구성원들은 한국 근현대 선종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월산은 1968년 금오선사에게서 전법(傳法)의 인가를 받았다. 금오는 입적 직전, 문도 제자들에게 오른쪽 손바닥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때 그가 일어나 “홀연히 본래사를 깨달으니 부처와 조사가 어디에 있느뇨. 뱃속에 건곤을 간직하고 몸을 돌려 사자후를 한다. 세우지 않고, 버리지 않고, 쉬지 않는다(忽覺本來事 佛祖在何處 肚裏藏乾坤 轉身獅子吼 不立 不捨 不休).”고 하자 금오가 대중들에게 모든 일을 월산에게 부촉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월산은 참선 수행 이외에 조계종단의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미 1950년대의 종단 정화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한 바 있으며,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차례(1968년, 1978년) 역임하였다. 법주사·신흥사·동화사 등의 명찰에서 주지를 지냈으며, 1974년부터 불국사의 주지를 맡아 강원 선원 등을 개설하여 수행도량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국내 여러 선원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후학 양성에도 매진하였으며, 1986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에 취임하여 종단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한편 1970년에는 불교·천주교·성공회·원불교·유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종교협의회 초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이후 종교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20여 년 이상이나 주석하던 불국선원 염화실에서 세속 나이 86세 법랍 55세로 입적한 그는, 입적 3일 전 제자들의 간청으로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본래 그 자리는 하늘 땅보다 먼저이니라(廻廻一生 未移一步 本來其位 天地以前).”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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