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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 鶴峰 金誠一Kim SeongIl

1538 ~ 1593

조선

작가약력

  • 1538(중종 33)∼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작가 소개

본관 의성(義城).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峰). 안동 임하(臨河) 출생. 1556년(명종 11) 도산서원으로 가서 이황(李滉)을 만나 그 문하생이 되었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正字)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 ·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에 노력하였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귀국 이듬해인 1579년 홍문관교리를 거쳐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가 되어 장기간 끌어온 민사상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김여물(金汝岉)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1590년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통신사행에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러한 발언이 나온 것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서인과 동인사이에 치열했던 정치싸움 때문이었다. 당시 서인들은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었는데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하여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목적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던 서인들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이 귀양을 갔으며 이들의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설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보고 때문에 임진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각인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류성룡의 변호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었다. 경상도로 내려가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며, 의병을 두루 모으고 관군과 의병간의 협력도 도모케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 8월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충정을 다할 기회를 맞았다.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모으며,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진주성을 왜군으로부터 지키도록 하였다. 1593년 순찰사로서 각 고을의 항전 상태를 살피고 독려하기도 하였으나 병으로 곧 세상을 떠났다.
주리설을 따랐고, 예학에도 밝아 <가례>를 준수하였다. 저서로는 《해사록 海槎錄》 《상례고증 喪禮考證》 등이 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泗濱)서원, 영양의 영산(英山)서원, 의성 빙계(氷溪)서원, 하동 영계(永溪)서원, 청송 송학(松鶴)서원, 나주 경현(景賢)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출처/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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