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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당 김석준 小棠 金奭準Kim SeokJun
1831 ~ 1915
조선
서예
작가약력
- 1831(순조 31)∼1915. 조선 후기의 시인·서도가.
작가 소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희보(姬保), 호는 소당(小棠)·효리재(孝里齋)·묵지도인(墨指道人) 또는 연백당(硏白堂). 본래 중인 출신으로 아버지는 역관(譯官)인 김계운(金繼運)이며, 어머니는 한양 유씨(漢陽劉氏)로 유봉길(劉逢吉)의 딸이다. 당대에 명성을 떨친 서도가 김계술(金繼述)이 당숙이다. 현기(玄錡)와 이상적(李尙迪)으로부터 시를 배웠다.
김석준은 역과(譯科)에 올라 역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만년에 벼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까지 이르렀다는 것 이외에는 생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없는 편이다. 다만, 역관 신분을 활용하여 시인으로서의 대단히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음을 시집을 토대로 살필 수 있다.
김석준은 역관으로서 중국을 내왕하면서 당시 청나라의 문인들에게 우리나라의 시 작품, 특히 이언진(李彦瑱)의 작품 등을 소개했던 일이 중국측 문인들의 기록에서 보인다.
이러한 그의 활동범위는 중국은 물론 일본 및 유구(琉球 : 지금의 오키나와)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다. 당시에 문학계에서 이들 역관출신의 시인들(이언진·이상적·정지윤 등)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김석준의 작품세계는 역관으로서의 체험세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자신이 보고 들은 외국의 풍물 등을 소재로 한 ‘죽지사(竹枝詞)’ 계통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화국죽지사(和國竹枝詞)」는 오언율시 22수로 일본의 당시 풍물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윤정현(尹定鉉)은 김석준의 이 작품을 이상적의 「일본잡사(日本雜事)」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상적과의 시적인 영향 관계를 고려하더라도 역관출신의 시인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외국풍물을 소재로 삼는 일련의 작품경향은 김석준의 경우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김석준의 시세계는 1865년(고종 2)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보인다고 그 자신이 술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시 선생인 이상적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서 일어난 것이다.
그 뒤에 김석준은 자신이 평생 교제한 많은 이들에 대한 감회를 회인체(懷人體)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는 일에 온 정력을 쏟는다. 약 200수에 달하는 이 일련의 회인시(懷人詩)는 당시 문학사의 인적 구성상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그 수록 범위가 중국 및 일본 문인들까지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에 당시 국제적인 문화 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김석준은 당대에 서도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김정희(金正喜)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글씨는 북조풍(北朝風)의 예서(隷書) 및 지두서(指頭書) 등에서 일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홍약루시초집(紅藥樓詩初集)』·『회인시록(懷人詩錄)』·『속회인시록(續懷人詩錄)』 등이 있다.
김석준은 역과(譯科)에 올라 역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만년에 벼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까지 이르렀다는 것 이외에는 생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없는 편이다. 다만, 역관 신분을 활용하여 시인으로서의 대단히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음을 시집을 토대로 살필 수 있다.
김석준은 역관으로서 중국을 내왕하면서 당시 청나라의 문인들에게 우리나라의 시 작품, 특히 이언진(李彦瑱)의 작품 등을 소개했던 일이 중국측 문인들의 기록에서 보인다.
이러한 그의 활동범위는 중국은 물론 일본 및 유구(琉球 : 지금의 오키나와)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다. 당시에 문학계에서 이들 역관출신의 시인들(이언진·이상적·정지윤 등)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김석준의 작품세계는 역관으로서의 체험세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자신이 보고 들은 외국의 풍물 등을 소재로 한 ‘죽지사(竹枝詞)’ 계통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화국죽지사(和國竹枝詞)」는 오언율시 22수로 일본의 당시 풍물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윤정현(尹定鉉)은 김석준의 이 작품을 이상적의 「일본잡사(日本雜事)」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상적과의 시적인 영향 관계를 고려하더라도 역관출신의 시인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외국풍물을 소재로 삼는 일련의 작품경향은 김석준의 경우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김석준의 시세계는 1865년(고종 2)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보인다고 그 자신이 술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시 선생인 이상적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서 일어난 것이다.
그 뒤에 김석준은 자신이 평생 교제한 많은 이들에 대한 감회를 회인체(懷人體)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는 일에 온 정력을 쏟는다. 약 200수에 달하는 이 일련의 회인시(懷人詩)는 당시 문학사의 인적 구성상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그 수록 범위가 중국 및 일본 문인들까지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에 당시 국제적인 문화 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김석준은 당대에 서도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김정희(金正喜)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글씨는 북조풍(北朝風)의 예서(隷書) 및 지두서(指頭書) 등에서 일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홍약루시초집(紅藥樓詩初集)』·『회인시록(懷人詩錄)』·『속회인시록(續懷人詩錄)』 등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