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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 金生Kim Saeng
711 ~ 791
통일신라
서예
작가약력
- 711(성덕왕 10)∼791(원성왕 7).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
작가 소개
자는 지서(知瑞). 별명 구(玖). 『삼국사기』권48 열전 제8 김생조에 의하면, “김생은 부모가 한미(寒微: 사람의 형편이 구차하고 신분이 변변하지 못함)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팔십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폭을 내보이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하였다.”고 한다.
그의 행적 또한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 충주목(忠州牧) 불우조(佛宇條) 김생사항(金生寺項)에 “김생이 두타행(頭陀行 : 번뇌를 끊고 의식주에 대한 탐심이 없이 깨끗하게 불법을 닦는 일)을 닦으며 이곳에 머물렀기에 김생사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생의 글씨로 전해지는 작품들이 모두 사찰 또는 불교와 관련된 점으로 보아 ‘호불불취(好佛不娶: 부처를 좋아해 장가를 들지 않음)’하였다는 그의 생을 짐작할 뿐이다. 그는 특히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하여 해동제일(海東第一)의 서예가로 평가받아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그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그의 진적(眞蹟: 실제의 유적)이 귀해져 이광사(李匡師)의 『원교서결 圓嶠書訣』에서 그의 진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할 정도였다. 김생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이 비의 비문 글씨는 고려 광종 5년(954)에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순류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運筆: 붓 놀림)로 서가(書家)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또한, 짜임새나 획의 처리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틀에 박힌 글씨에서 벗어나 운치를 살리고 있다. 그의 유일한 서첩으로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가 있으며, 『해동명적(海東名蹟)』·『대동서법(大東書法)』에 몇 점이 실려 있다. 특히,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는 자유분방하면서 힘이 넘치는 필적이다.
이 밖에 「창림사비(昌林寺碑)」가 있는데 현재 원비는 물론 탁본조차 전하지 않는다. 단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가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서 “창림사비는 신라김생의 글씨로 자획에 전형(典型)이 깊어 당인(唐人)의 명각(明刻: 뛰어난 조각가)이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품평이 전한다.
그의 행적 또한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 충주목(忠州牧) 불우조(佛宇條) 김생사항(金生寺項)에 “김생이 두타행(頭陀行 : 번뇌를 끊고 의식주에 대한 탐심이 없이 깨끗하게 불법을 닦는 일)을 닦으며 이곳에 머물렀기에 김생사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생의 글씨로 전해지는 작품들이 모두 사찰 또는 불교와 관련된 점으로 보아 ‘호불불취(好佛不娶: 부처를 좋아해 장가를 들지 않음)’하였다는 그의 생을 짐작할 뿐이다. 그는 특히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하여 해동제일(海東第一)의 서예가로 평가받아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그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그의 진적(眞蹟: 실제의 유적)이 귀해져 이광사(李匡師)의 『원교서결 圓嶠書訣』에서 그의 진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할 정도였다. 김생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이 비의 비문 글씨는 고려 광종 5년(954)에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순류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運筆: 붓 놀림)로 서가(書家)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또한, 짜임새나 획의 처리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틀에 박힌 글씨에서 벗어나 운치를 살리고 있다. 그의 유일한 서첩으로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가 있으며, 『해동명적(海東名蹟)』·『대동서법(大東書法)』에 몇 점이 실려 있다. 특히,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는 자유분방하면서 힘이 넘치는 필적이다.
이 밖에 「창림사비(昌林寺碑)」가 있는데 현재 원비는 물론 탁본조차 전하지 않는다. 단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가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서 “창림사비는 신라김생의 글씨로 자획에 전형(典型)이 깊어 당인(唐人)의 명각(明刻: 뛰어난 조각가)이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품평이 전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