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작품이미지

청음 김상헌 淸陰 金尙憲Kim SangHeon

1570 ~ 1652

조선

작가약력

  • 1570(선조 3)∼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 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 : 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 출생.
번(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생해(生海)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극효(克孝)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수찬(副修撰)·좌랑·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應敎)·직제학을 거쳐, 1611년(광해군 4)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광찬(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내(琜)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시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1585년(선조 8)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이정구(李廷龜)·김유(金楺)·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작가의 경매 작품

제42회 I Contact 온라인경매

제56회 봄경매

제6회 I Contact 온라인경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