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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거사 소식 東坡居士 蘇軾Su Shi

1037 ~ 1101

중국 북송

작가약력

  • 1036(북송 경우 3) ~ 1101(건중 정국 1). 중국 북송의 문인·시인·서예가. 별칭 소동파(蘇東坡)

작가 소개

북송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 자는 자첨(子瞻) 또는 화중(和仲)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또는 설당(雪堂), 단명(端明), 미산적선객(眉山謫仙客), 소염경(笑髥卿), 적벽선(赤壁仙) 등을 썼으며, 애칭으로 파공(坡公) 또는 파선(坡仙)을 썼다. 소순(蘇洵)의 아들이고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렸다. 송나라 최고의 시인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인종(仁宗) 가우(嘉祐) 2년(1057) 진사에 급제하고, 다시 제과(制科)에 합격했다. 봉상부첨서판관(鳳翔府簽書判官)으로 있다가 불려 사관(史館)에 근무하면서 개봉부추관(開封府推官)을 지냈다. 구양수(歐陽脩)에게 인정을 받아 문단에 등장했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으로 신종(神宗) 희녕(熙寧) 중에 그 불편함을 지적한 글을 올렸다가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전출되었다. 밀주(密州)와 서주(徐州), 호주(湖州)의 지주(知州)를 지냈다. 원풍(元豊) 연간에 “독서가 만 권에 달해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했다가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경사(京師)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중에 호북성 황주단련사(黃州團練使)로 유배되었다. 철종(哲宗)이 즉위하면서 구법당이 득세하자 등주지주(登州知州)로 재기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과 한림학사겸시독(翰林學士兼侍讀)에 올랐다.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로 항주지주(杭州知州)가 되었는데, 크게 가물어 기근과 질병이 함께 창궐하자 공미(供米)을 올리는 것을 면제받아 저렴한 가격으로 방출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항주가 바다에 가까워 주민들이 샘물에 짠 맛이 들어 괴로워하자 하천을 준설하는 한편 서호(西湖) 주변에 30리의 제방을 증축하여 주민들의 편리를 도모했다. 원우(元祐) 6년(1091) 불려 한림승지(翰林承旨)가 되었지만, 얼마 뒤 참소를 당해 영주지주(潁州知州)로 나갔다가 양주(揚州)로 옮겼다. 나중에 단명전한림시독양학사(端明殿翰林侍讀兩學士)로 정주지주(定州知州)로 나갔는데, 혜주(惠州)로 폄적되었다. 소성(紹聖) 연간에 다시 경주별가(瓊州別駕)로 폄적되고, 창화(昌化)에 거주했다.
황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중국 최남단의 해남도(海南島)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있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석방되어 돌아오다가 강소성 상주(常州)에서 죽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했다. 대표작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났다. 저서에 『동파칠집(東坡七集)』과 『동파지림(東坡志林)』, 『동파악부(東坡樂府)』, 『구지필기(仇池筆記)』, 『논어설(論語說)』 등이 있다.
출처/중국역대인명사전, 미술대사전

작가의 경매 작품

제 42회 가을경매

제 35회 겨울경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