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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조희연 杞園 趙羲淵Cho HuiYeon

1856 ~ 1915

근대

작가약력

  • 1856(철종 7)∼1915. 무관·고위관료.

작가 소개

1856년 5월 26일 경기도 통진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평양(平壤)이고, 자는 심원(心源), 호는 기원(杞園)이다. 아버지는 좌참찬 조존혁(趙存赫)이다. 국권피탈 후 황해도장관을 지낸 조희문(趙羲聞)의 형이다. 조선 말기에 기기국 방판, 창원부사, 군부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 궁내부 특진관, 표훈원 총재, 대한공업회 총재 등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1915년 7월 20일 사망했다.

1874년(고종 11) 9월 무과에 급제해서 1881년 훈련원 첨정에 임명되었다. 1883년 5월 기기국 위원(委員), 1886년 2월 기기국 감조위원(監造委員), 11월 기기국 철창감동관위원(鐵廠監董官委員)을 지냈으며, 1887년 4월 기기국 위원으로 별군직을 겸직했다. 10월 희천군수로서 당상 선전관 겸 기기국 방판(?辦)을 겸직하였다. 그해 군기(軍器) 시찰 및 무역 업무를 겸하여 상하이·홍콩 등지를 돌아보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 오사카·도쿄 등지에 가서 포병공창(砲兵工廠)을 견학하였다. 귀국 후 청·일 양국으로부터 무기 등을 사들였다.
1888년 7월 통위영 우참영관(右參領官)으로 연무공원 참리사무(鍊武公院參理事務)를 보았고, 8월 연무공원 사찰(査察), 12월 풍덕부사에 임명되었다. 1889년 12월 별군직을 겸했고, 1890년 1월 기기국 방판도 겸했다. 1891년 1월 창원부사로 전임되었고, 5월 경상도 광무감리(鑛務監理)를 겸했다. 1893년 5월 친군 장위영 병방(親軍壯衛營兵房)으로서 6월 기기국 회판(會辦)에 부임했다.
1894년 동학운동 때에는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 이원회(李元會) 등에게 출진에 따른 군량 등 제반물자를 파송하였다. 또한, 그해 5월 청나라 청원설(請援說)이 자자할 때 “청병이 우리나라에 오면 동아(東亞)의 소요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열강의 간섭이 심해져 나라의 기초가 위태롭게 된다.”라고 하면서 청나라 군대 파견 요청은 불가하다고 거듭 극간하였다. 6월 장위사(壯衛使)에 등용되었고 군국기무처 회의원을 겸하면서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출병할 것을 요구하자 그가 분발하여 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 이범래(李範來) 등을 선발대로 파송하였다. 7월에는 지의금(知義禁), 형조참판, 군무아문 협판,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을 겸직했고 군무아문 서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1월 제2차 김홍집내각이 수립되며 군무대신에 올랐다.
1895년 2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을 위문하고자 정부 대표로 특파청국전지일진군대위문대사(特派淸國戰地日陣軍隊慰問大使)에 임명되어 뉴좡[牛莊]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 직후인 4월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와의 알력으로 해임되었다. 10월 제3차 김홍집 내각에서 을미사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군부대신 안경수(安?壽) 후임으로 군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파면되고 을미사변 주범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유길준(兪吉濬)·장박(張博, 장석주로 개명)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오무라 지사부로(大村智三郞)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897년 이후 일본에서 육군참모차장 가와카미[川上操六]를 통해 나고야·오사카·요코스카[橫須賀]·히로시마 등지의 군사 시설을 시찰하였고, 1899년 북해도에 가서 척식경영(拓殖經營)을 둘러보는 등 13년간을 주유(周遊)하였다. 1907년 8월 귀국해서 9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10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어 종사하다가 1909년 4월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를 역임했다. 1908년 2월 망명자 모임인 강구회(講舊會)를 발기해서 조직했고, 7월 한일하선운송회사를 설립해서 부총재에 선출되어 전국에 지사를 만들었다. 11월 한흥농회(韓興農會) 1회 총회에서 총재에 선정되었고,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위촉되었다. 1909년 1월 국채보상검정통합회 찬성위원장을 지냈고, 2월 대한장유(醬油)제조주식회사 설립했다. 4월 대한농회 총재, 9월 대한공업회 총재로 활동했으며, 11월 일본 황태자가 주는 1,000환을 받았다. 1910년 3월 숭교간친회에 유지비용을 기부했고, 6월 한일 양국의 친목을 도모하는 한일입지회(韓日立志會)를 조직했다.
국권피탈에 협력한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서 남작 작위를 받았고, 같은 달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15년 4월까지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또 10월에 조선제마(製麻)주식회사 창립을 준비했고, 12월에는 김윤식(金允植), 조중응(趙重應), 장석주와 함께 일선사적 및 구관습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다. 3월 오성(五星)학교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 찬성원, 5월 우마매매(牛馬賣買)합자회사 총재에 선출되었다. 이 무렵 채무가 많아 가산이 차압되자 순종이 이를 구제하기 위해 8월에 2,500원을 하사했다. 같은 달 일제의 조선병합 1주년을 기념해 「일한병합 일주년 감상」(『매일신보』1911.8.29.)이라는 축사를 실었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9월 메이지[明治] 천황 장례에 귀족대표로 참석했으며, 10월 조선창고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5주년 선전을 위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총회에 참석했다. 5월에는 계속되는 채무로 재산을 탕진해 작위 유지가 어렵게 되자 조선총독부가 작위반납을 종용해 ‘원(願)’에 따른 반납이라는 형식을 취해 작위를 포기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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