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작품이미지

동곡 조인승 東谷 曺寅承Jo InSeung

1842 ~ 1896

조선

작가약력

  • 1842(헌종 8)∼1896. 조선 말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창녕(昌寧). 도승지 조석원(曺錫元)의 아들이다. 1872년(고종 9) 알성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1년 응교로 홍문관에서 연명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척사의 소를 올린 이만손(李晩孫)·홍시중(洪時中) 등의 처벌을 청하였다. 이 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3년 집의가 되고 이듬해는 식년시의 시관(試官)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승정원의 동부승지로 있으면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일파의 처단을 청하는 계(啓)를 올렸다. 1888년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1890년 호군으로서 대호군 이승오(李承五) 등과 함께 과거의 시체(試體) 문제를 거론하였다.
같은 해 김춘희(金春熙)와 교체되어 동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92년에는 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894년 내무협판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군대를 파견하고, 조선의 내정을 간섭함으로써 조선을 지배하려 하였다.
6월 1일 오토리(大鳥圭介)공사가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제시하며, 개혁안조사위원으로 국왕이 신임하는 중신을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 때 6월 5일 내무독판(內務督辦) 신정희(申正熙), 협판 김종한(金宗漢) 등과 함께 내정개혁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6월 8일 남산 노인정(老人亭)에서 일본측과 회담을 개최하였다.
일본측은 5조 27항의 개혁안을 제시하며 수락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측 위원들은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내정개혁을 할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그리고 조선정부는 독자적으로 개혁을 실시하고자, 6월 11일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15인의 시원임대신을 당상으로 임명하였는데, 이 때 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 뒤 공무아문의 협판을 지내고 1895년 중추원의관으로서 춘천부 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성황후(明成皇后)시해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자, 춘천의 이항로(李恒老) 문인 이소응(李昭應)의 의병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서법(書法)이 뛰어났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작가의 경매 작품

제49회 I Contact 온라인경매

제60회 봄경매

제27회 I Contact 온라인경매

제13회 I Contact 온라인경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