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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 정경세 愚伏 鄭經世Jeong GyeongSe

1563 ~ 1633

조선

작가약력

  • 1563년(명종 18)∼1633년(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작가 소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 이씨(陜川李氏)로 가(軻)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78년(선조 11)경상도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했다. 1582년회시(會試)에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곧 통사랑대교로 승진되었다.
1596년이조좌랑에 시강원문학을 겸했으며, 잠시 영남어사의 특명을 받아 어왜진영(禦倭鎭營)의 각처를 순시하고 돌아와 홍문관교리에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고, 이어서 이조정랑·시강원문학을 겸하였다. 이조정랑에 있을 때에는 인사 행정이 공정하여 현사(賢邪)를 엄선해서 임용·퇴출했으며, 특정인에게 경중을 둔 일이 없었다.
1598년 2월승정원우승지, 3월에 승정원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이때 영남 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民力)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백성들의 풍습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영해부사가 되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풍습을 교화하였다. 그 해 겨울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당시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가 시끄러웠기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마을에 존애원(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그는 도학(道學)이 정몽주(鄭夢周)에서 시작되어 이황(李滉)에게서 집성되었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같은 여러 현인들이 나와 정학(正學)으로 더욱 깊이 연구하여 왕성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남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상주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였으며, 이곳에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였다.
1607년대구부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이듬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서는 화약(火藥)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하도록 병부(兵部)에 글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힘썼기에 특지(特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칭호를 받았다.
1610년 4월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는 외직을 원해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는 다시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정인홍(鄭仁弘)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주자(朱子)를 흠모하고 존경하였으며, 주서(朱書)를 편람하고 정독하여 후진 교육이나 조의(朝議)·경연에서 진강할 때 항상 주서(朱書)에 근거를 두었다. 그의 저서 『양정편(養正篇)』은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표리가 되고, 『주문작해(朱文酌海)』는 이황이 편찬한 『주서절요(朱書節要)』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경전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황뉴(黃紐)·홍호(洪鎬)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喪禮參考)』가 있다.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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