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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甫 金基昶

Kim KiChang

  • 청산귀로

靑山歸路

Way Back Home in Green Mountain

견본채색
Ink and Color on Silk

65×119.1㎝

우측 하단에 낙관

액자

추정가

  • KRW  9,000,000 ~ 27,000,000
  • USD   6,690 ~ 20,070
  • JPY     989,000 ~ 2,965,000

작품 상세 설명

청각 장애를 가졌던 운보는 그림을 통해 끊임없이 실험을 했던 작가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예술가의 진취적인 기질이 화면 곳곳에 묻어 있다. 운보 전성기의 시작인 1970년대 현대화랑에서의 개인전을 기점으로 청록산수가 첫선을 보였다. 푸른빛과 초록빛이 구별이 안 되게 뒤섞인 ‘청록산수’는 화백이 스스로 창안한 화풍으로 꺼질 줄 모르는 생명의 힘으로 용솟음치는 조형에의 욕구를 화면에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한국인의 역동성과 맞닿아 원초적 고향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거친 필법과 단호한 판단으로 속도감을 더하며 심산의 분위기를 그려냄으로써 그 맛이 살아나는 작품이다. 세밀한 표현을 과감하게 생략한 탓에 한편 웅장하고 거칠면서 포근하다.

화가는 가장 좋아하는 색인 청록을 중심으로 화면의 반 이상을 산으로 채우고 산만큼이나 푸른 풍성한 소나무로 화면 중앙을 가득 매웠다. 개울가에 물이 졸졸 흐르고 초동은 소를 몰며 유유자적하게 귀로를 한다. 새들은 하늘을 날고 멀리 높은 산에서 초록의 바람이 분다. 노년에 그린 운보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는 빠른 붓놀림의 감지에 있다. 눈을 감아도 선연하게 그려낼 수 있는 달인의 경지. 그 위치에서 화가가 단참에 붓을 들어 거침없이 일필휘지로 그린 그림들이 그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날더러 마지막 소원을 말하라면 도인이 되어 선(禪)의 삼매경에서 그림을 드리는 것입니다.”
- 작가의 어록 中

작가 소개

김기창(金基昶)은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장티푸스를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었다. 1930년 17세 때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수업을 받았다. 그림을 배운 지 6개월 만인 1931년 5월 《판상도무(널뛰기)》(1931)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입선을 했다. 그 후 1936년까지 매년 선전에서 입선을 했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4회 연속 특선을 기록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김기창이 그림에 입문한 1930년부터 1944년까지의 초기 학습시기와 성장기의 화풍은 스승인 김은호의 영향으로 일본화풍의 사실성에 충실한 채색화가 주류를 이뤘다. 또한 인물의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며 절제된 구성 속에 색채의 조화를 꾀했다. 《동자》(1930년대), 《가을》(1934), 《소와 소년》(1935), 《고담(옛이야기)》(1937)은 이 시기의 작품으로 선전에서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김기창은 1943년 운니동 집에서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을 만났다. 박래현은 일본 도쿄에서 미술을 공부한 재원으로, 당시 선전에서 특선을 하여 시상식에 온 길에 화단의 선배인 김기창을 찾은 것이다. 김기창은 1945년 광복을 맞아 아호 ‘운포 雲圃’에서 ‘포(圃)’자의 사각형 틀을 없애고 ‘운보 雲甫’로 바꿨다. 이는 구속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자신의 독립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1946년 김기창은 박래현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과 더불어 그의 화풍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의 채색 위주의 사실 묘사에서 벗어나 수묵담채화의 반추상적 경향을 선보였다. 《복덕방》(1953), 《엿장수》(1953), 《구멍가게》(1953)와 같은 연작은 그가 아내인 박래현과 함께 입체파적인 해체성향을 시도한 작품들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군산 피난 시절에는 《예수의 일생》 연작 30점을 그렸다. 이 연작은 예수를 우리나라 사람의 얼굴에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60년대에는 의도적인 우연의 형상을 통해 비정형의 추상세계를 지향하며 색채에서도 강렬함을 보여주었다. 《태양을 먹은 새》(1968)는 이러한 추상표현 시기의 대표작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독창적 화풍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가 탄생한 시기이다. 1976년 아내인 박래현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진 그는 한동안 붓을 들지 못하다가 이를 극복하고 자기만의 고유한 양식을 완성했다. ‘바보산수’와 ‘바보화조’ 연작, 그리고 1980년대의 ‘청록산수’ 연작은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새로운 표현 작품으로 현대적인 한국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김기창의 ‘바보산수’, ‘바보화조’는 회화의 순수성과 꾸밈없는 인간 본성을 표현한 것으로, 여기에서의 바보는 소박하고 솔직하며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말한다. 그는 과감한 생략과 강조, 파격적인 배치, 형태와 공간의 왜곡 등을 통해 형상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과 일탈의 세계를 새롭게 열어 보였다. 또한 서구의 현대적인 양식이 아닌 우리 고유의 전통화인 민화를 바탕으로 하여 해학과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1980년대 바보화풍은 청록산수로 변화를 갖는데, 산수화의 현대적 화풍으로 청록색의 짙은 농담이 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청명한 기운이 더해져 독특한 수묵담채의 기법을 보여주었다. 청록산수는 김기창 특유의 자유스러움과 생명력 넘치는 힘이 잘 표현되어 대중적으로도 커다란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후기 다량으로 그려진 청록산수는 빠른 제작과 반복된 소재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김기창은 1990년대 초반 단색조 추상양식의 ‘점과 선’ 연작을 선보였다. 이 연작은 대형 화선지에 점과 선이 가득 찬 대담한 구성의 수묵 추상화로 서양의 액션페인팅과 유사하여 그의 독자적 화풍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김기창은 1981년 6월부터 3개월 동안 세계 화필기행을 하고 돌아와 각 나라의 풍속과 풍경을 화폭에 담아 신문에 연재했다. 그리고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에 대한 깊은 인상으로 충북 청원군에 ‘운보의 집’을 지었다. 1984년 ‘운보의 집’이 완공된 이후 김기창은 그곳에 은거하며 자연과 더불어 자신의 작품세계를 가다듬었다. 또한 장애인 복지 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김기창은 우리가 일상으로 보는 만 원 권 지폐에 있는 세종대왕의 얼굴을 그렸으며, 1993년 예술의 전당 전시회 때에는 하루에 1만 명이 입장한 진기록도 세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강점기의 친일행적을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2001년 1월 23일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으로 《가을》(1934), 《복덕방》(1953),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아악의 리듬》(1967),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새벽 종소리》(1975), 《바보화조》(1976), 《청산도》(1976), 《오수(午睡)》(1976), 《달밤》(1978), 《바보산수》(1987), 《시집가는 날》(198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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